지중해 삼국 - 무슬림
이집트나 터키나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 많은 나라다. 알라신에 귀의하고 신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 무슬림에게는 현세에서 지켜야할 5가지를 실행하도록 되어 있다. 신앙고백, 1일 5회의 예배(salat), 수입의 1/40로의 구제, 이슬람력 제9월의 금식(sawm), 일생에 한번 메카 순례를 하는 일(hajj)이다.
이슬람 국가를 방문하면 하루 5번의 요란한 종소리와 아잔(예배 시간을 알리는 육성 외침)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슬람달력 9월이면 라마단 의식이 이루어 지는 걸 볼 수 있다. 요즘이 바로 그 라마단 기간이다.
라마단(타는 듯한 더위와 건조함을 의미)은 단식을 통해 속죄와 나눔을 공유 하고자 이슬람력(우리나라 음력과 비슷)으로 매년 9월에 이루어진다. 14세 이상의 모든 무슬림이 아침 해뜰 때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밥은 물론이고 물조차 마셔서는 안 되는 의식이다. 약의 복용이나 흡연도 허용되지 않고, 단 한모금의 물도 안 되며 부부관계도 물론 할 수 없다. 다만 임신, 생리 중, 아이를 낳았거나 수유하는 여성, 여행자, 노약자, 어린이, 병자, 정신이상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나, 이들도 금식을 지키지 않은 일 수 만큼 나중에 따로 실행해야 한다고 한다.
기독교가 십자가가 상징이라면, 초승달은 샛별과 함께 이슬람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마호메트가 알라 신으로부터 최초의 계시를 받을 때 초승달과 샛별이 떠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슬람 국기에는 초승달이 보이고 마찬가지로 기독교 국가에는 십자가 보인다. 라마단의 시작도 그 전날 밤에 초승달을 봄으로써 시작되며(날이 흐려 초승달을 볼 수 없으면 미뤄진다) 새 초승달이 뜰 때 끝난다.
탈레반에 인질로 잡혀있는 한인들을 구출할 때 현지의 적신월사(Red Crescent Societies)가 큰 역할을 했는데, 적신월사는 이슬람권 국가들의 적십자사다.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을 놓고 발단된 십자군 전쟁 만 아니었어도 적십자기가 이슬람국가에서도 통용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당시 전쟁에선 십자와 초승달(新月)이 그려진 기(旗)가 피 비린내 나는 전장 어디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십자보다는 초승달을 사용함을 우리로서는 이해를 할 밖에 없다.
무슬림의 예배 장소는 모스크라 하는데, 초기 모스크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예배장소(메디나에 있던 그의 집 안뜰)를 모방했기 때문에 단지 성역으로 구분된 평지에 불과했다지만 이후 이스람권이 커지면서 모스크도 성대해진다. 모스크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돔이고, 돔의 끝은 보통 초승달로 장식한다. 미나렛(minaret 모스크의 첨탑 혹은 종탑)도 필수다. 건물 내면에는 메카를 향해 있는 ‘미라브’가 있고, 미라브 오른쪽에 있는 계단 꼭대기에는 ‘민바르’라는 앉는 자리가 있는데 이는 설교자가 교탁으로 이용한다. 미나렛의 개수는 모스크의 규모와 설립한 자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으면 메카 모스크의 미나렛은 (원래 6개였는데, 터키의 아흐메트1세의 불루 모스크가 6개로 만드는 바람에 한 개를 더 세워서) 7개라고 한다.
역사를 보면, 대부분 정복자들은 기존 문화를 철저히 파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전쟁 자체가 파괴의 시작이며 약탈로 이어진다. 지배자가 바뀌면 기존의 최고 시설부터 무너진다. 그 속에서 보면 이슬람에게서는 타 지배자와는 다른 부분이 보인다. 정교회의 본산이라는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화 한 예가 그 중 하나다.
올바른 사람이라면 그 어떤 신앙이나 사상을 가졌든지 인간을 함부로 핍박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무스림의 그 다섯가지 기둥의 실천에는 단순히 신을 섬기는 행위이기 보다는 끈임 없이 분출될 포악한 인간성을 순화 시키고 다스리게 하기 위한 종교적 강제성 보인다. 끈임없는 교육이 아니겠는가? 모든 신앙의 상위 이념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고 본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타를 핍박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신앙을 왜곡하는 못된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
문명이 세월 따라 흩어져 가는 역사의 현장에서,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 허망함, 무상함 그리고 나약함에 슬픔이 일었다.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건 자연 뿐, 인간의 손을 거친 명품은 자연의 움직임 앞엔 속수무책이다. 그 자연도 항상성을 갖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무력한 인간만을 본 건 아니다. 무한한 자유에의 의지와 아름다운 사랑을 가진 마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것임도 발견된다. 태어난 생명체는 언젠가 죽는다. 다른 생명체 보다 고도의 의식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 삶의 질이 여타의 종족과는 달라야 한다. 삶이 윤택하다 함은 정신적으로 느끼는 만족이 수반할 때이다. 배불리 먹는 일로 만 윤택함을 누리지 못하는 게 인간이고, 가진 것에 비례하여 안락하며 풍부함을 누리는 건 아니다. 정신적 만족의 윤택함이 영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세월로도 재해로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질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하잘 것 없는 인간에게 위대한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들이라는 생각된다. 올바른 신앙 속에는 타를 정복하여 핍박하고 미워하고 탈취하여 상처 받은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 아닌, 사람에게로의 헌신 즉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그 정신에 의한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잘 산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사는 방법은 거부된다. 끈임없는 자기 반성과 성찰이 있고, 그 위에 사람을 향한 애정 어린 행위가 있다. 나누고, 배려하고 다독이고 섬기고 하는 그 행위로의 삶이 있는 인간에게서 위대함을 볼 수 있다. 그로 인한 업적이야말로 참으로 존귀한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