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님 생신으로
큰동서는 시부모님의 생신을 (남편의)고향집까지 가서 혼자서 준비했었다.
시부모님은 아들 다섯 중 셋째만 고향에 남고 모두 직장 찾아 떠나있다보니 남은 자식과 함께 사시게 되었다.
모시고 있는 아들이 있음에도 맏이라는 이유로 당연한 듯 그렇게 해 왔다.
시아버님 돌아가신 후부터는 시어머님 생신상을 큰댁에서 차리게 되었다.
큰댁에서 명절 때 차례를 지내게 되다보니 시모님도 따라 아들네로 명절을 쇠러 오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명절이면 보름 이상 머물다 가셨으므로 추석 후 열 이틀 후인 어머니 생신(음 8.27)을 큰댁에서 치루게 된 것도 있다.
2년마다 전근을 다니는 시숙따라, 시모님 생신 장소가 달라졌다. 그래선지 생신날은 큰집과 우리 내외만 보인다.
내가 출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연가를 내고 남편만 가는 일도 잦았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형제가 돌아가며 생신상을 차려보자는 의견으로, 결혼 안 한 막네를 제외한 네 형제들이 한 바퀴가 다 돌고,
제 작년 큰집 상차림 때엔 또 큰집과 우리 내외만 덩그랬었다.
그런데, 작년 우리 차례인 서울에선 온 형제가 쉬 모이고 손주란 손주는 다 와서
축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다 참석하여 벅적거리니 보기에 참 좋았다.
형제조카들이 다 모이기도 쉽고, 다른 형제들 특히 큰댁 짐도 덜자는 생각에,
생신은 서울에서 주욱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 하였다. 좋다고들 하였다.
헌데, 그 서울나들이도 단 한 해 만에 여든 넘긴 시모님이 오가시기 힘들어 하셔,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 가지 만 남고.
남편은 "우리 마누라가 (시모님 생신 부담을)한다고 했지?" 몇 번을 묻는다.
"백번을 하래도 하지. 돈 벌어 어디에 써, 그런 일에 안 쓰면."
좀 더 시원한 대답이 없나 그렇게 되 묻지 않아도 기꺼이 할 일을.... 남편들이 마누라 눈치를 보긴 보나보다.
"할머니가 연로하셔서 그리 오래 사시지 못하니, 명절이나 생신 때만이라도 빠짐 없이 가서 뵙도록 해라." 하였더니,
딸아이는 만사를 접고 참석했다. 아들녀석은 감감이다. 손주는 우리 집 큰 아이가 대표로 참석이다.
손주가 여덟인데, 이눔들이.... 결혼하고 나면 더 오가기 힘들 텐데....
오랜만에 간 할머니댁 많이 변한 걸 딸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또, 게까지 갔으니 설악산도 누리고....
아이들 어릴 적에 놀던 강도 나가보고, 한계령도 올라 가 본다.
가을이 피어오르기 시작해 바람은 차갑다.
산위의 바위들은 변함없이 빼어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1989년 아들 만 2살, 딸 5살(강 바람이 차가웠는지 제 아빠 윗 옷을 걸쳐 입었다)
20년이 지난 모습
요 아랫 사진 다리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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