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부고
아버지 82세 요즘으로 보자면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누워계셨는지는 모르지만 새엄마는 6년이라 했던 것 같다. 심장병으로 아산병원 응급실로 가서 심장수술을 받았었고, 당뇨로 이틀에 한 번 투석을 하셨으며, 일 년에 몇 번은 입원을 했다. 폭력과 폭언으로 얼룩졌던 젊은 날의 그 남편임에도 새엄마는 지극정성으로 간병을 하셨다. 아버지 입원 소식을 듣고 몇 번 문병을 갔었고, 갈 때마다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친정어머니와 마찬 가지로 의사에 대해서 막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으셨던 분인 것 같다. 대인 관계의 내 두 친정 부모님은 참으로 별난 사람들이었다. 별나다는 걸 세상 밖에서야 알 수 있었다. 다 그리 사는 줄 알았던 어린 시절엔 감정적으로나 행동적으로 늘 시달림을 당했기에 나는 두 분을 부모임에도 좋아하지 못한다. 그나마 어머님은 내가 직장을 다니는 동안 내 두 아이를 돌보아 주시는 수고를 하셨으니 고마움이 있지만 아버지완 만회할 기회도 없었다.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 다닐 때도 학비를 주지 않아 애를 먹였다. 툭하면 학교 다니지 말라 하셨던 아버지. 인색하고 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친 조부모님이 맏이인 아버지를 귀하게 기르셨던 게 그런 인품으로 크게 했을지 모른다는 추측이다.
그 아버지의 부고가 어머니 사시던 집을 정리하여 이사를 하고 나머지 짐 정리하느라 내내 바쁜 시간을 지내며 정신이 하나도 없던 그 날, 또 대금을 다 치룬 여행의 출발 이틀 앞 둔 5월 27일 금요일 피곤한 아침에 막내 동생으로부터 듣는다. "누나,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나는 그동안 가입해 두었던 예다함 상조회에 전화를 하고, 동생들에게 메시지를 넣고,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남편과 함께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좀 단출하게 상을 치루면 좋으련만, 검소한 새 엄마의 첫 사치요 마지막 사치인지 만 이틀 간의 장례식장 사용비용은 음식 값 포함 약 1000만원, 따로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상조회에서 유골함도 고급으로 추가하고 묘지에 가서 또 재를 지낸다.
나는 아버지 부고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결혼식은 알리지만 장례식은 알리지 않으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던 터라 그랬다. 그래도 카톡 주고받던 친구 방에 귀띔이 됐고, 주 3회 가는 체조 모임에 못 가는 이유를 말하다 얼핏 상중임을 밝히게 되었다. 병원에 누워계신 친정어머니는 막내딸 선미에게 전화하셔서 알리게 되었단다. 젊어 이혼하여 자식이 끈이 되어 전해 받는 소식이었을 게다.
동생들은 슬퍼 눈물을 흘렸지만 밋밋한 나의 감정은 어떤 걸까? 우리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독립심이다. 부모님은 내 생애 방해였지 도움이 되질 않았다는 생각이다. 철저한 홀로서기가 아니면 그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죄로 회오리 속을 걸어야 했다.
결혼은 내 인생의 turning point 되어 주었다. 그 두 분을 도려낼 수 있는 기회요, 내 계획대로 이끌 수 있는 장이었으니 말이다. 이후 나는 행복이란 걸 가질 수 있었다.
막내를 제외한 마음에 안 드는 두 남동생, 혼자서 꿋꿋이 살아야 하는 두 여동생이 망인이 남긴 내 형제들이다. 그리고 정말 30년도 넘는 세월 만에 내 삼촌들과 고모를 만났다. 세월 저편 속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여유 있게 지금에 와 있다. 고모는 초등학교 1학년 같은 반을 지낸 동창이기도 하다.
그리운 할머니! 따뜻한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시다. 딸과 손녀가 같이 컸지만 한 번도 할머니가 나보다 고모를 예뻐할 거라 인지하지 않았었다. 어려운 시절에 희생과 사랑으로 일생을 지내신 고맙고 가엾으신 분. 나는 딸인 고모보다 아니 그 누구보다 그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시던 자상하신 분. 그 할머니가 편찮으셔도 나는 내 일로 간병 한 번 제대로 못해드렸다. 새벽에 깨우지 않았다고 할머니께 투정을 부렸고 할머니의 미안해서 쩔쩔 매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편하게 누운 아버지의 시신을 보면서도 흔들림이 없던 내 감정. 마지막 유골함을 만지고 절하는 것조차 거부한 삭막한 이별식 속에 사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