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나 일정이나 다른 날과 별 다를 것도 없었지만
이번 여행은 결혼 25주년 행사였다.
토요일, 세 식구는 새 살림에 필요할 것 같은 도구를 챙겨
아들놈의 원룸에 짐을 넣어주고는 녀석을 불렀다.
각자 좋아하는 메뉴를 골라 점심을 같이 하곤 우리 부부는 속초로 향했다.
두 주 만에 온 딸아이의 “그럼 저 혼자 있어요?”라는 말을 뒤로 하고
콘도는 빈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차로 꽉 차 있다.
미시령터널을 넘어 있는 울산바위는 아직 겨울이다.
화진포는 살얼음이 없어지고 심한 바람으로 물결이 일었다.
멀리 산봉우리는 아직 눈에 덮여있지만 춘 삼월이다.
“애들 잘 기르고, 살림도 잘 했고, 그동안 우리 마누라 수고 했어.”
“남편 잘 만나 행복하고 살고 있는데? 수고는 무슨.”
이 여행에서 할 수 있었던 대화다.
어린 시절 장래 희망이 뭐냐 물으면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세상일에 능동적일 수 없었던 그 시절 나의 최선의 선택은 ‘현모양처’가 되는 거였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다 된 지금 시점에 되짚어 물어온다 해도, 구체적인 기대가 없는 건 매 한가지다.
사실이 어떠하든 나는 행복하고, 남편은 그걸 증명해 주었으니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돌이켜보면 남편을 위해서 뭔가 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식 일에 열성적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쓰는 비용과 노고에 대해 무조건 흡족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엄마 노릇하기 아주 편한 케이스였다고나 할까.
그는 마눌이 속 썩고 귀찮아할만한 일을 벌인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요구하는 일엔 최선을 다 하여 노력하였다.
“우리 마누라한테 선물 사 줘야 되는데 뭐가 좋은가?”
“찐한 뽀뽀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