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세 가지 삶

 

인간에게는 세 가지 삶의 선택이 있다. 첫째, 선하지 못하게 사는 것. 둘째, 선하게 살되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 셋째, 선하게 살되 좋은 결과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선하게 살지 못하면 현재에도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생명처럼 살고, 죽어서도 현재 경험하고 있는 마음과 똑같은 4악처에 태어난다. 사악처에서는 행복이 없고 오직 괴로움만 있으며, 수명은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만큼 살다가 다시 윤회한다.

 

선하게 살되 좋은 결과를 바라면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욕계천상이나 색계, 무색계의 천상에 태어난다. 인간은 모든 생명 중에서 오직 혼자서만 행복과 불행을 경험한다. 욕계천상과 색계, 무색계 천상은 행복만 있다. 하지만 바람이 있는 공덕행을 행하면 고통뿐인 윤회를 해야 한다.

 

선하게 살되 좋은 결과를 바라지 않으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으로 도과를 성취하여 윤회하는 생명의 세계로부터 벗어난다. 이 길이 팔정도며, 중도의 길이다. 바람이 없는 공덕행을 하면 고통뿐인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교방송 각묵스님의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강의 22회 모두를 들었다.

내가 아는 누구도 道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설명하지 못했었다.

대부분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道를 말할 뿐 일목묘연하게 제시하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강의 속에는 참으로 논리적으로 자세하게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상좌불교의 산전수전 겪은 묘원법사가 찾은 수행법의 근거이며 그와 일치하는 (초기)불교학이다.

 

석가부처의 가르침은 실천적인 것이다.

개념적으로 알고만 있는 건 교학일 뿐 실천 수행은 필수다. 

이로써,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는 사람들에게 무얼 가르치려했는지를 개념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해가 가야 실천이 따르는 현대인으로서, 이런 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린다.

벗어남 경(Nimokkha-sutta)(S1:2)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당신은 중생들의 벗어남과 풀려남과 떨쳐버림에 대해 아십니까?”


“도반이여, 나는 중생들의 벗어남과 풀려남과 떨쳐버림에 대해 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당신은 중생들의 벗어남과 풀려남과 떨쳐버림에 대해 아십니까?”

 

4. “즐김에 뿌리박은 존재[有] 멸진해버렸고
인식과 알음알이 나는 모두 부수었고
느낌들을 소멸하고 가라앉혀버렸노라.


도반이여, 그러므로 나는 이제 아노니,
중생들의 해탈과 벗어남과 떨쳐버림을.”

 

 

출처 : 각묵스님 옮김(2009). 상윳따니까야 1권 pp 137-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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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의 존재(有) 주해에서....


욕계와 색계 무색계의 존재(有, bhava)에는 각각 두 가지가 있다.

업의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와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 upapatti-bhava]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를 생기게 하는 업을 행하면 그것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다.

그것으로부터 생긴 무더기들이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이다.

 


출처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글쓴이 : 해맑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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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아차림

 

 

 

 

 

1. 알아차림, 사띠sati의 정의

 

알아차림은 마음이 일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매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팔정도를 닦아갑니다. 바로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가장 선한 의업意業입니다.

 

빨리Pāli어로 사띠sati는 기억과 알아차림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합니다. 기억이라고 하면 보통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띠의 기억은 현재 이 순간에 대한 기억입니다. 마음이 현재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현재를 기억하는 각성覺醒된 마음이 일어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사띠sati를 알아차림, 마음챙김, 새김, 주시, 수동적 주의집중 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알아차림’으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아차림, 사띠sati는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 현재를 놓치지 않는 것,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는 것, 현재를 이어서 지켜보는 것, 현재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알아차림은 ‘할 때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두고 지켜보며, 또 현재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소멸하는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축약하면 37조도품이지만, 이것을 다시 축약하면 8정도며, 8정도는 계‧정‧혜로 축약됩니다. 이 계‧정‧혜는 다시 알아차림 하나로 귀결됩니다. 수행자가 현재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어떤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번뇌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이며, 바로 팔정도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 사띠sati입니다.

 

 

2. 알아차릴 대상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릴 대상은 현재 자신의 정신과 물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자신의 감각기관이 감각 대상과 부딪혀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것은 지금 여기에 실재實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인식할 수 없는 과거나 미래의 것은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알아차릴 대상이 아닙니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것을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존재하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인식할 때만 실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존재하더라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비실재非實在입니다.

 

또한 지금 인식하는 실재도 모양, 이름, 개념과 같은 관념을 통해 인식하는 관념적 실재가 있고, 지금 인식하는 실재를 단지 느껴서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인식하는 궁극적 실재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바로 궁극적 실재를 알아차릴 대상으로 합니다. 궁극적 실재는 모두 생멸하며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가집니다.

 

 

3. 대상을 알아차리는 방법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은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분리한다는 것은 대상을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 ‘나’라는 고정관념, 선입견으로 색칠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대상을 자기 입장에서 보고 탐진치로 반응하던 것을 이제는 알아차림으로 잠깐 멈추고, 대상을 단지 대상으로 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 렌즈가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담아오듯이, 수행자도 대상을 사실대로 알아차려 기억[念]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스크린에 마음을 두고 지금 나타나는 장면들을 그냥 봅니다. 그래도 영화가 끝나면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영화 보듯이, 자기의 생각을 섞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들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몸과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몸과 마음의 성품을 알게 됩니다. 그 성품이란 무상 ‧고 ‧무아입니다.

 

 

4. 수행자의 마음가짐

 

알아차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수행자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또 억제하지 않고, 무엇이든 나타나는 대로 다 받아들여, 차분하게 지켜볼 때 알아차림을 잘 이어갈 수가 있습니다.

 

만일 수행자에게 바라는 마음, 성냄, 근심, 슬픔, 걱정이 있다면 그런 마음에 휩쓸려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대상을 법으로 분리하지 못하고 내 것으로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알아차려 마음의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그 다음 몸의 느낌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알아차려 내려가면서 몸의 긴장을 풉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다 이완되면서 편안해집니다.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지금 나타난 대상을 가볍게, 부드럽게, 그러나 정확하게 알아차립니다. 이런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몸과 마음은 더욱 안정되면서 계속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초보 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수행을 잘하려는 마음으로 수행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줄이려고 하는 것인데, 수행자가 수행이 잘 되길 바라거나, 수행이 안 될 때 실망하거나, 또한 수행이 조금 될 때 아만심을 낸다면, 이것은 수행을 하면서 오히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지금까지는 매 순간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에 따라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없애려는 욕망으로 살았지만, 알아차림은 이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알아차려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수행은 알아차림을 반복하여 닦음으로서 알아차리는 새로운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습관 때문에 수행이 잘 안됩니다. 이때는 이 상황이 바로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수행자가 만일 그것을 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나는 수행을 못한다.’고 실망하면 다시 자신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수행이 잘 되기도 바라지 않으며, 수행 중에 경험하는 망상, 통증, 졸음, 게으름, 의심 등도 없애려고 하지 않고, 지금 나타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대상으로 알아차리며, 그 변화를 지켜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의무입니다.

 

수행이란 나쁜 현상을 좋은 현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나타난 현상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지금 나타난 대상은 그것이 좋은 것이나 싫은 것이나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비록 망상이나 통증이나 졸음이 나타나도 이것은 호흡처럼 하나의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모두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리면 이 과정에서 인내하는 힘과 알아차리는 힘이 쌓입니다. 그래서 이런 원하지 않는 현상들이 바로 수행을 도와주는 재료가 됩니다. 사실 이 세상은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시비 분별하는 자신의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이 생각은 관념일 뿐 실재가 아닙니다.

 

5. 알아차림의 역할

 

첫째, 알아차림은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감각기관을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부딪칠 때 좋은 것은 탐심으로, 싫은 것은 성냄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있으면 대상은 단지 대상일 뿐 내 것이 아니므로, 대상에 대한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일 알아차림이라는 문지기가 없다면 그 순간 탐진치라는 도둑이 들어와 계율과 마음의 평온을 훔쳐갈 것입니다.

 

둘째, 알아차림은 불선업을 막아서 선업으로 바꿉니다. 탐진치가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관용․자애․지혜가 나타납니다. 이런 마음은 바른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이 바로 선업을 행하는 순간이며, 이 선업의 힘은 괴로움을 소멸하는 지혜의 씨앗이 됩니다.

 

셋째, 알아차림은 계율을 지키게 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마음이 대상에 잘 집중되면 대상의 성품을 보는 힘이 생기고, 이런 지혜들이 모여서 번뇌를 소멸하고 집착을 끊어 궁극에는 열반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계‧정‧혜를 다 포함합니다.

 

넷째, 알아차림은 몸과 마음의 성품을 보게 합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계속 알아차리면 정신과 물질의 성품을 통찰하게 됩니다. 오온은 매순간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고, 생멸하는 것은 괴로움이며, 오온에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통찰하게 됩니다. 이렇게 무상‧고‧무아를 통찰한 지혜는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소멸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을 소멸합니다.

 

 

6. 알아차림이 잘 안 되는 이유

 

누구나 알아차림을 잘 하고 싶지만 알아차림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감각적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니라서 그동안 즐거운 것을 찾아다니던 마음이 알아차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또 알아차리면 무슨 이익이 있을까라는 의심이 있어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잘 안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알아차림을 해보면, 알아차림을 할 때는 괴로움이 없는데, 알아차림을 놓치고 행위를 하면 반드시 괴로움이 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일이 결코 시시하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 지금까지 우리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 본적이 없어서 알아차리려는 마음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평소의 습관대로 행위를 합니다.

 

또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내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항상 대상에 휘둘려서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그러나 이때라도 알아차림을 놓친 것을 다시 알아차리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만큼 알아차리는 힘이 쌓여서 다시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 아직 알아차리는 힘은 약하고 탐진치를 일으키는 힘은 강해서 알아차림을 하다가도 대상에 휩쓸려서 알아차림을 놓쳐버립니다. 이때 놓친 것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노력입니다. 그래서 좌선 한 시간 동안에 한 호흡만이라도 제대로 알아차리면 그것이 두 호흡, 세 호흡으로 늘어나면서 알아차리는 힘이 쌓여갑니다.

 

 

7. 알아차림을 잘하려면

 

첫째,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지금 자세는 바른가?’ ‘지금 몸은 무엇을 하는가?’ 라고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둘째,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몸에 마음을 붙이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잘 때까지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그때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이렇게 몸을 알아차리는 중에 불쑥 어떤 마음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현재하는 일에 마음을 둡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닦으면 알아차리는 힘이 길러지며, 점차 알아차리는 것이 능숙해지고 나중에는 알아차림이 저절로 따라 다니게 됩니다.

 

셋째, 알아차림을 한 뒤에는 알아차린 대상에 대해서는 ‘그랬구나!’라고 알고 놓아야 합니다. 알아차린 것에 대한 자기 나름의 시비나 판단분별을 하면 바로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알아차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이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등등을 생각하면 이미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지나간 현상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를 단순하게 사실대로 알아차려서 ‘그랬구나!’하고 놓아버리고, 바로 지금 새롭게 나타난 대상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과 마음은 계속 새로운 조건에 의해 생멸하면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알아차려야할 대상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것은 놓아버리고 지금 경험하는 대상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셋째, 알아차림에는 마침표가 없습니다. 현재라는 시제 속에는 항상 알아차릴 대상이 있기 때문에 항상 현재의 대상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일 마음이 이미 경험한 대상에 머물러 있으면 알아차림에 마침표를 찍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표를 찍었더라도 다시 알아차림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은 과거이고, 지금은 놓친 것을 아는 현재가 있습니다. 아무리 늦은 알아차림이라도 한번 알아차리면 그만입니다. 알아차림을 시작하면 다시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과 노력과 집중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발전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력이란 힘을 주어 대상을 강하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현재를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새로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알아차림이란 티켓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이 티켓은 지고의 행복인 열반, 깨달음, 윤회의 종식, 불사不死에 도착하는 티켓입니다.

 

출처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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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위빠사나는 무슨 뜻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위빠사나는 무슨 뜻이며,

대념처경에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으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낸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위빠사나( vi + passana)라는 말은

부처님 당시의 언어인 빨리어 입니다.

빨리어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언어입니다.

그 당시에 보통 사람들의 언어는 빨리어였고,

소수의 상류층 사람들만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였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법을 만날 수 있도록

빨리어로 법문을 하셨고, 제자들에게도 빨리어로 법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기 불교 경전(부처님의 원음)들은 빨리어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부처님의 말씀을 한자(漢字)를 통하지 않고

빨리어에서 직접 우리나라 언어로 번역하여 출판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바른 불교, 부처님의 직설가르침,

제대로 된 불교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이 성숙되어있습니다. 


4념처  위빠사나 수행은 4념처라는 네 군데 알아차릴 대상을

사마타가 아닌 위빠사나로  수행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vi 는 '분리하다' '여러 가지' 라는 뜻이 있는데

 '여러 가지'에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뜻,

즉 삼법인을 의미하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passana 는 통찰한다. 꿰뚫어 본다. 직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을 분리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네 가지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여러 가지 면(무상, 고, 무아의 측면)이 통찰된다는 뜻 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로 생긴 지혜를

있는 그대로 직관하여 본 통찰지혜라고 합니다.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4념처)이란

지금 이 순간, 즉 현재의 몸과 마음인데,

이것은  느낌으로 알게 되고, 그 느낌을 법(담마, 마음의 대상)으로,

알아차릴 대상으로 받아들여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오직 현재의 몸과 마음이 대상이 되며,

그 이외에 다른 대상들은 일차적인 알아차릴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즉 이 순간의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이란 네 가지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분리해서

현재의 마음이 직접 알아차리는 마음의 행위입니다.

알아차림을 하고 또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것이 4념처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몸과 마음이

실제로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그 실상을 바르게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이해는 지금까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나'라고 집착했던 잘못된 견해를 깨주는 것이며  

그 결과로 자신에 대한 잘못된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내게 됩니다.

 

잘못된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것의 의미는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자유와 해탈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교와 수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인간을 모든 번뇌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친 종교는 불교이며

그 수행법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가르친 위빠사나 수행법뿐입니다.

 

 

출처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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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념처 수행에서 느낌에 대한 수행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느낌으로 아는 것이고 이 느낌은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좋거나 싫은 느낌을 일으켜 윤회를 하게하고 괴로움을 준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오늘도 느낌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 부처님의 말씀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질문을 하면 그에 따라 적절하게 답변을 해주십니다. 경전에는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다르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느낌에 대해서는 비교적 일관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때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느낌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느낌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또 느낌의 그침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이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이 있어 위험함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들로부터 벗어남이란 무엇입니까?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느낌이란 세 가지가 있는데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것을 느낌이라고 한다.

접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접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실천하는 것인데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이것이 팔정도고 위빠사나입니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수행자는 느낌을 독으로 보고 괴로움을 약으로 봐야 합니다. 느낌의 달콤함에 빠지면 괴로움이 찾아옵니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때문에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탐욕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

아난다여,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설하였다. 초선정에 들면 말이 그치며, 이선정에 들면 일으킨 생각과 추론적인 사유가 그치며, 삼선정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사선정에 들면 들숨과 날숨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진정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어리석음이 그친다.

이것이 색계 4선정과 무색계 4선정을 다 포함한 내용입니다. 초선정에서는 말이 끊어지고 2선정에 들면 추론과 생각이 끊어집니다. 망상은 끊어질 단계에 가서 끊어집니다. 3선정에서는 일어난 희열이 그치고 4선정에 들면 들숨과 날숨이 그친다고 했는데, 수행에서 호흡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다 단계적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공무변처부터는 무색계 선정입니다. 몸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 나타나는 여러 가지 과정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어떤 단계에서 어떤 현상이 나타나고 어떤 것들이 소멸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나타나는 망상, 졸음, 통증, 호흡과 몸이 사라지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의식이 고양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에 나타난 모든 현상은 법으로 봐야 합니다. ‘이게 왜 생겼지?’라고 의심하면 안됩니다. 의심하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어떤 현상이나 그냥 지켜볼 때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의 지혜로 갑니다. 색계1선정부터 무색계4선정, 상수멸정까지의 모든 과정들은 하나의 대상에 걸리지 않고 알아차린 결과 다음으로 갑니다.

 

모든 것을 법으로 봐야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대상으로 볼 때 걸림이 없이 다음 단계로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행 중에 나타나는 것은 다 법으로, 현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행하다 죽지 않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스스로 헤쳐 나가기 어렵기 때문에 스승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수행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혼자서 할 때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도 하나의 대상으로 손님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것들이 지혜를 남기고 감사하게 떠날 것입니다. 손님을 맞이합시다

 

첨부파일 52회 2010년_2월_3일.hwp

 

2010년 2월 3일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12연기의 시작인 무명을 말씀드렸고,

그리고 그 무명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혜라는 것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무명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96쪽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96쪽의 위에서부터 4 번째 줄에 있는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일어난다.’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일어납니다.

무명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행위를 하게 합니다.

그래서 무명의 상태에 따라서 일어나는 행도 다릅니다.


어쨌거나 연기가 회전할 때는 무명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무명으로 시작해서 무명의 상태에 따른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행이 일어난다’입니다.


이때 행은 업의 형성을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과거에 이루어진 업의 형성력,

마음의 의도, 신, 구, 의, 삼업 그런 것들을 통틀어서

행(行)이라고 말합니다.


자! 보시뿐만 아니라 계율을 지키는 것 역시

천인이나 범천으로 태어나는 등

내생에서 보다 나은 지위로 태어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지곤 합니다.

이것이 무명으로 인하여 선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마음으로 악한 의도를 가지고 악한 행위를 하면 바로 불 선업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무명으로 인하여 불 선업이 일어남을 말합니다.


여러분! 계율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한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한다면 탐욕이 있는 것이라서 이것이 무명으로 한 행이 됩니다.


그러나 바른 일을 하고도 바른 일을 했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선한 마음으로 한 것이라서 선한 행이 됩니다.


이렇듯이 무명의 상태에 따라서 행이 이루어지고

지혜의 상태에 따라서 행이 이루어집니다.


이때의 무명은 연기이고 행은 연생입니다.

무명이 원인이 되어서 행이 일어날 때 그 행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생긴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무명과 행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원인입니다.


무명은 무명으로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원인을 일으켜서 결과인 행을 만들게 합니다.

이것이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입니다.


보통 보시를 한 후에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이루어지길 기원하는 말을 합니다.

이 기원이 이루어져서 그 기원을 바란 사람이 천인이나 범천이 된다고 해도

다음 생에는 바로 고통뿐인 태어남이 있을 뿐이지 결코 윤회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면

무명을 원인으로 선업이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선업은 완전한 선업이 아닙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오직 괴로움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이 행복의 원천이고,

정신과 물질이 소멸한 열반은 탐스럽지 못하며,

열반에 이르는 길은 험하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몸으로 하는 세 가지 행위를 통해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 중에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할 것이며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생의 행복을 바라고 보시를 행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남을 속이고 강도짓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행위이면서 이것을 업이라고 말합니다.

이 업의 동의어를 행이라고 말합니다.


행은 세 가지 종류인데 생각으로 짓는 행, 말로 짓는 행, 몸으로 짓는 행이 있습니다.

그리고 행은 의도를 전제로 합니다.

의도의 기능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내고, 하도록 부추기는 것으로써

모든 행위의 주요 동기가 됩니다.


의도는 살생이나 보시 등,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통해서 의도의 본성을 경험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12연기에서 무명도 마음이고 행도 마음입니다.

실제 우리가 몸으로 짓는 행이 있지만, 그것을 물질로 보지 않고,

마음의 의도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행을 마음의 형성력, 마음의 작용으로 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행에는 선업의 과보를 낳는 공덕이 되는 행과

악업의 과보를 낳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이 있습니다.

그리고 움직임이 없다는 뜻에서 부동행(不動行)이라는,

무색계 선정에 있는 흔들림이 없는 행이 있습니다.


색계선과 욕계에서 업보를 받는 욕계선을

모두 공덕이 되는 행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공덕이라는 말을 빨리어로는 뿐냐라고 하는데

이 말은 깨끗이 하는 것, 또는 정화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 이 정화, 깨끗이 라는 것은 비누로 몸에 있는 때를 씻어내는 것처럼

우리는 보시, 지계, 수행을 통해서 업의 더러움을 제거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행은 현생과 내생의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공덕의 또 다른 의미는 선행을 한 사람이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경향입니다.

여기서 선행이라는 것은 건강, 장수, 부귀 등 다양한 소원을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만약 열반에 대한 소원으로 선행을 행하였다면,

이 선행으로 인해 열반을 얻을 수 있는 삶으로 가거나,

마지막 생에 이르기 전까지의 행복과 잘 살 수 있는 보장을 받습니다.


업은 지음을 실행하는 것으로서, 행복을 얻기 위해 무언가 하는 노력입니다.

이는 선하거나 불선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되는 공덕 행은 선업의 과보를 가져오는 선행입니다.


욕계 선행은 여덟 가지가 있고 색계 선행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선행은 보시, 지계, 수행의 세 가지 요소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은 업의 과보가 대단히 큰 선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보시자는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하는 동안이나, 보시를 하고 난 후에

함께 다 모두 기뻐해야 합니다.

경전에 의하면 이러한 보시는 매우 좋은 업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시를 어떻게 해야 될까요?

보시는,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하는 동안이나 보시를 하고 난 후에

모두 기쁠 때만이 완전한 보시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으로 보시를 한다면,

바람 때문에 그것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보시를 한 뒤에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보시를 하고 괴로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할 때나, 보시를 하고 나서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보시만이 완전한 보시가 될 것입니다.


보시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평정의 상태일지라도

보시자의 마음이 깨끗하다면 이 보시행은 매우 큰 업의 효력을 지닙니다.


업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보시행은 합리적인 것으로,

탐욕과 성냄, 무지의 축적된 성향 없이 재생의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도덕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이나 업의 과보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없는 보시행도

선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지혜가 결여된 보시입니다.


이런 보시는 살아가면서 보시행에 대한 선한 과보를 받겠지만,

다음 생에 도를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지는 못합니다.


자기가 베풀 때에 바람이 없는 공덕 행을 할 때만이

그 선한 과보의 영향으로 다음 생에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태어남이 지혜가 있을 때만이 가장 고귀한 태어남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목표는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윤회를 끊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없는 보시를 할 때만이 가장 수승한 지혜로 태어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수가 있으며,

어떤 사람은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선한 행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두 종류의 선한 행위 중에 자발적으로 한 선한 행위가 더 큰 과보를 받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선한 행위 네 가지를 마지막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여덟 가지 욕계의 선한 마음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할 때마다 우리는 이들 선법중의 하나에 의해 유발되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집중과 명상을 할 때 우리는 이런 여덟 가지 선법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만약 선정에 이르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한다면,

수행자가 삼매를 잘 계발하면 색계 선정을 얻습니다.


선이란 대상에 오롯이 집중된 마음인 심일경성을 말합니다.

사마타 선정은 순일하게 고요한 상태를 얻기 위해 집중을 합니다.

그러나 선정 삼매는 바람이 불지 않는 허공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같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색계 선정에는 네 가지가 있고,

아비담마에서는 색계 선정을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선(禪)이라고 번역되는 말은 쟈나라는 것인데

이것을 중국에서는 선나로 음역되고,

다시 우리는 선(禪)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대상을 명상하기 때문에, 혹은 반대되는 것을 태워버리기 때문에 선(禪)이라고 한다.’

라고 선(禪)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반대되는 것이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섯 가지 장애인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 게으름과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정은 사마타 수행으로 얻어집니다.

이런 수행은 삼매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을 한 가지 선택된 대상에 고착시킴으로써 모든 정신적인 혼란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장애는 억압되고 마음은 그 대상에 완전히 몰입됩니다.

경장에 따르면 선은 초선에서 4선까지 네 가지로 정의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이고

이것을 바른 삼매라고 합니다.


논장에서는 이것을 색계 선정이라고 정의하고

경장에 나타난 공무변처 등 사처를 무색계 선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禪)과 삼매(三昧)는 동의어로 취급됩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네 가지 색계 선은

첫째 초선, 둘째 2선, 셋째 3선, 넷째 4선입니다.

네 가지 무색계 선은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입니다.


경전에서 네 가지 색계 선을 다시 살펴보면,

초선은 일으킨 생각이고, 두 번째는 지속적인 고찰이고,

세 번째는 희열이고, 네 번째는 행복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2선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고 희열과 행복만 있고

3선은 행복만 있고 4선은 행복도 사라지고 평온이 완성됩니다.

물론 이 넷에 마음이 대상 한 곳에 집중된 상태 즉, 집중은 두루 하고 있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는 초선의 일으킨 생각이 가라앉고

평온, 희열, 행복이 있는 경우를 2선으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선의 경지는 결코 출세간의 경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마타 수행의 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중요하고 강력한 토대이지만

깨달음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좌 불교에서 이 선은 사마타의 경지이기 때문에 번뇌가 소멸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번뇌를 완전히 멸하기 위해서는

모든 유위법의 무상, 고, 무아를 꿰뚫어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하는데,

이렇게 선(禪) 없이 위빠사나 수행만 할 수 있는 것을 순수 위빠사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빠알리어로는 숟다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이 순수 위빠사나는 사마타 수행의 선정 없이 오직 위빠사나 수행으로

열반을 이룰 수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마타 수행을 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 있고,

또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숟다 위빠사나라는 순수 위빠사나를 통해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상 여러분과 함께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글쓴이 : 해맑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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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46회 2010년_1월_28일.hwp

2010년 1월 28일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어리석음은 나의 어리석음을 보지 못하고 남의 어리석음만 보는 것입니다.

고요해야할 곳에서 흔들리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관용이 일어나야할 곳에서 탐욕이 일어난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대상의 실재하는 것을 보지 않고 대상을 관념으로 보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주어야할 것을 주지 않고 갖지 말아야할 것은 갖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모든 것이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가 열리면

그 순간 어리석음은 사라집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12연기의 시작인 무명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윤회의 시작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윤회의 시작이 제1원인과 혼돈되어서는 안 됩니다.

윤회의 시작은 무명으로 눈이 가려졌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윤회의 시작이

어느 날, 어느 시부터 시작되었느냐하는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시간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 때문에 윤회를 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윤회의 시작이 무명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르고 어리석기 때문에 윤회가 시작된다는 것으로

이는 시간의 개념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연기의 시원은 모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기의 시작이 무명이라는 것은

연기의 근본원인이 모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알면 바로 지혜입니다.

그래서 모르면 무명이고 알면 지혜로 바뀝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는 무명으로 시작하여 무명으로 끝이 납니다.

과거에 모르는 채로 태어나서 현재에나 미래에 모르는 채로 죽는다면

다시 모르는 채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시작도 무명이고 끝도 무명입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그러나 윤회가 없는 세계에서는 지혜로 시작하여 지혜로 끝이 납니다.

무명으로 태어났지만 현재에 지혜로 시작하여 미래에도 지혜로 끝난다면

바로 거기에는 태어남이 없습니다.


무명과 갈애가 없는 것이 지혜이며

지혜가 있으면 바라는 것이 없어 다시 태어나는 생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는 두 가지의 시작이 있고 두 가지의 끝이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에 무명으로 시작해서 현재에 무명이 계속되어

미래에 무명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과거에 갈애로 시작해서 현재에 갈애가 계속되어

미래에도 갈애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마하시 사야도께서 설하신 괴로움의 원인인

무지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법문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불교의 법문은 동의어 반복이 많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이러한 반복을 통하여 훌륭한 학습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반복이야말로 어려운 법을 이해하는데 매우 좋은 수단입니다.

그래서 여러 스승들의 같은 말이 반복되더라도 싫증을 느끼지 마시고

계속 들으셔서 이해의 폭을 넓혀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한 말을 오늘 내가 다시 들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지난 시간에 들은 이야기와 오늘 들은 이야기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시간에 듣는 마음과 오늘 듣는 마음이 같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들은 것을 또 들었을 때, 오늘 새로운 마음이 지혜가 열려서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듣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자, 여러분,

그러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무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오히려 집착으로 인해서 행복하고 집착이 없으면 삶이 따분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즐거운 감각대상, 음식, 의복, 그리고 친구들을 찾습니다.

집착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삶을 무료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동호인이나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있을 때만이

마치 사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갈애는 범부가 오욕을 애착하는 것과 몹시 목말라하는 것을 갈애라고 말합니다.

이 갈애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다고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갈애는 갈애로 그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이 갈애는 반드시 집착을 해서 업을 생성하기 때문에

시작은 갈애이지만 결과는 행위를 하게 해서 그 과보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착한다는 것은 마음에 새겨두고 잊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떨어지지 않고 계속 집착을 하는 결과로

업을 생성해서 그 과보를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범부들은 집착할 것이 없으면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즐겁지 못한 모습을 가리고

그것을 즐거운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래서 갈애를 제거한 아라한의 삶은 즐기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조건지어진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항상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나 부처는 좋아서 사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생명이 있어서 삽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웃을 때도 크게 웃지 않고 그냥 미소만 띄웁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열심히 수행하면 갈애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몇몇 수행자는 과거에 수행을 하기 전과 달리 삶을 즐기지 않게 됩니다.

집중 수행처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종종 가정생활을 지루해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행자가 잘난 체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이런 행동은 이 무미건조한 세상사에 대해서 흥미를 잃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모든 것은 가치관의 차이로 결론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감각적 욕망을 여전히 극복할 수 없다면 수행자가 느끼는 따분함은

일시적인 것으로 머지않아 가정생활에 다시 적응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생활에 대해 완전히 환멸을 느낀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수행자의 이러한 기분이나 일시적 상태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행위가 있을 때는 단지 과정으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을 탐구해보고 얼마나 진정으로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를 가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즐거움에 대한 욕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 많다면,

여전히 우리는 갈애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여러분! 갈애가 없다면 좌절감을 맛볼 것입니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우리는 괴로움을 보지 못하고 행복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친 듯이 즐길 거리를 찾습니다.

사실은 즐길 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괴로울 거리를 찾는 것과 하등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즐길 것을 찾지만

그 즐길 것의 결과가 결국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무명 때문에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영화나 연극을 좋아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취미에는 시간과 돈이 들지만 사람들은 갈애로 인하여

이런 것들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갈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들 취미가 사실상 괴로움의 원천일 뿐입니다.


더 분명한 예는 흡연입니다.

흡연자는 담배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을 즐기지만

비흡연자에게는 일종의 자학적 괴로움입니다.

비흡연자는 흡연자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없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에 대한 갈애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걱정이 없고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그래서 갈애가 일어나는 가장 가까운 원인은 느낌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느낌이고 누구나 이 느낌을 더 즐기려고 해서 갈애가 일어납니다.


괴로움의 원천인 갈애는 각성효과가 있는 나뭇잎을 씹는 것과 같습니다.

나뭇잎을 씹으면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나뭇잎을 씹는 습관에서도 분명하게 갈애가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뭇잎 씹기를 즐기지만

실제로는 나뭇잎을 씹는다는 것이 번거롭기 짝이 없는 습관입니다.


남방에서는 비틀이라는 나뭇잎을 씹으면 각성효과가 있는데

입안이 붉고 이가 붉고 매우 보기가 흉합니다.

그리고 그 침을 삼키지 못해서 늘 더러운 침을 뱉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각적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용되는 수단들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습니다.


흡연자는 씹어서 각성효과가 있는 그런 나뭇잎을 씹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갈애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이 갈애가 부추긴 노력이

바로 늙음, 병듦, 죽음으로 이어지는 재생의 주된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괴로움과 그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은 일상생활에서 분명히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진리를 전체적으로 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매우 심오한 것이며,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법문을 듣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나 지식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지혜로 통찰해야 합니다.


지식은 표피적인 것에 그치지만, 지혜는 실재하는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지식으로는 안개에 가려서 본질을 볼 수 없지만,

지혜로 보면 안개너머에 있는 진실을 압니다.


지식으로 보면 내가 느끼지만, 지혜로 보면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라고 압니다.

지식으로 보면 항상하지만, 지혜로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내린 결론은 언제나 자신의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 높은 실재가 있으니 판단을 유예하고 깊게 숙고해야 합니다.


여러분!

잘못된 견해는 바른 견해를 용납하지 못하고 더욱 배척합니다.

여기서 바른 견해란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하되 자연스럽게 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갈애이며, 이러한 갈애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을 선한 일에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번뇌를 만드는 일에 사용하고 있는가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무명은 모르는 마음이고 갈애는 바라는 마음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하고, 바라기 때문에 집착을 하여,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합니다.


누구나 과거에는 무명을 우두머리로 살았고 현재는 갈애를 동반자로 삽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명에 이끌리고 갈애에 내몰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바로 무명과 갈애가 물처럼 흘러가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거듭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을 하면,

무명이 지혜로 바뀌고 갈애가 관용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어리석음과 탐욕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러분!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면 메마른 평가가 되기 쉽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우르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원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몰랐기 때문에 과거에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알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오직 알아차림만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여러분들을 스스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번뇌를 가진 자는 번뇌가 불타버린 세계를 알지 못하며,

어떻게 불태우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명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글쓴이 : 해맑은 원글보기
메모 :

<묘원 법사의 불교방송  12연기와 위빠사나 법문(31, 32회)에서 발췌함>

 

경전에 있는 행복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한 때 거룩한 스승께서 사왓띠에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 삔띠까 장자의 동산에 계셨습니다 .

 

그때 용모가 단정한 천인이

밤중이 지나 제타 숲을 두루 비추며 스승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한 후에 한 쪽에 서서 게송으로 여쭈었습니다.

 

“많은 천인과 사람들은 최상의 행복을 바라면서 행복하고 있습니다.

최상의 행복을 말씀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어진 이와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자기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고,

올바르게 생활 하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지식과 기술과 훈련을 쌓고 절제하며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안정된 직업이 있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보시와 이치에 맞는 행위와 친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비난을 받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악을 싫어해 멀리하고 술을 절제하고

덕행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항상 겸손하고 온순하며,

매사에 만족감과 감사할 줄 알고.

적절할 때 설법을 듣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인내하는 것, 온순한 것, 수행자를 만나는 것,

적절할 때 법에 대해 담론하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수행을 하고 청정하게 살며

사성제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실천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음이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세상일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티가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지 실패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번영을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이것이야 말로 더 없는 행복이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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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사밧띠 근처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띠까 사원에 머물고 계셨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한 천인이 온 제타 숲을 환히 비추면서

세존 앞에 나가서 공손히 예를 올리고,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세존께 다음과 같이 물었다.


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께 몰락하는 사람에 대해서 묻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진보적인 사람은 쉽게 알 수 있다.

퇴보적인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다.

법을 사랑하는 자는 진보적인 자다.

법을 싫어하는 사람은 퇴보적인 자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우는 인간이 몰락하는 첫째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인간이 몰락하는 두 번째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악한 것이 그에게 귀여움을 받는다.

덕스러운 것에서 그는 어떠한 즐거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는 악한 생각들을 좋아한다.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우는 인간의 몰락의 두 번째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세 번째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둔하고 남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고

근면하지 않고 게으르고 화를 잘 내는 자.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운 인간이 몰락하는 세 번째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네 번째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누구든 부자이면서

나이든 부모님을 공양하지 않는 자.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운 인간이 몰락하는 네 번째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다섯 번째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거짓말로 브라만 또는 고행자

또는 다른 어떤 탁발 수도승을 기만하는 자.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우는 인간이 몰락하는 다섯 번째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여섯 번째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금과 식량 등 많은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 혼자만 그것을 즐긴다.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운 인간이 몰락하는 여섯 번째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일곱 번째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출생, 부, 또는 가문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친족을 무시하는 자.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우는 인간이 몰락하는 일곱 번째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여덟 번째 원인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방탕하고 술주정꾼 도박꾼

그리고 그가 갖고 있는 것은 모두 낭비하는 자.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운 여덟 번째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아홉 번째 원인을 가르쳐주십시오.


“만약 창녀들이나 다른 사람의 아내들을 보면서

자신의 아내가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운 인간이 몰락하는 아홉 번째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우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열 번째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나이든 남자가 매우 젊은 아내를 데려와서

지나치게 정력을 낭비하는 자.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운 인간이 몰락하는 열 번째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열한 번째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권위 있는 자리에 무절제하게 낭비하는 여자나

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남자를 임명하는 자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그러면 이것은 저희들이 배우는 인간이 몰락하는 열한 번째 원인입니다.


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 인간이 몰락하는 열두 번째 원인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어떤 이가 무사계급출신으로 자질이 부족한데도

야심만 있고, 군주가 되기를 바라는 자.

이것이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몰락하는 원인들을 잘 알았습니다.

통찰력을 지니신 세존께서 온 세계를 밝게 비추시니

모든 존재들이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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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천인들과 부처님께서 행복에 반하는

몰락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선정수행을 해야 하는가 알아보겠습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우리의 정신적 향상을 가로막는 것이 있어서 집중이 잘 안됩니다. 필연적으로 이런 족쇄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다섯 가지 장애라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억누르기 위해서 사마타 수행을 하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감각적 욕망, 둘째는 악한 의도 또는 성냄입니다. 세 번째가 혼침과 게으름, 네 번째는 들뜸과 회한, 다섯 번째가 회의적 의심입니다. 수행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먼저 이 다섯 가지 장애가 나타나서 집중이 되지 않도록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하나에 매달려서 온전하게 집중을 하면 이 다섯 가지 장애가 억눌려집니다. 이것을 선정수행이라고 합니다.

 

염불수행의 1차적 목적은 고요함입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깊은 선정상태에 이르면 자나깨나 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색계 4선정인 심일경성(心一境性)은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어서 번뇌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게 고요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선정의 고요함을 얻은 뒤에 위빠사나로 넘어와서 지혜수행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고요함은 지혜와 다릅니다. 다섯 가지 장애가 어느 정도 극복이 되어서 선정의 고요함이 생기면 무상, 고, 무아를 보는 통찰지혜 수행으로 넘어오는 즉,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상호보조적인 과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수행자의 궁극의 목표는 지혜여야 합니다. 지혜를 얻어야 지고의 행복인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수행시대 불교방송 묘원법사 말씀 중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됨)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3. 2. 22. 금요일 오후 5시 10분

                       지금은 수행시대-위빠사나 19

 

진행 : 이명학

대담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묘원 법사님

 

 

19회 2013년 2월 22일 금요일 오후 5시 10분

 

수행 질문

 

- 수행 과정에서 자주하는 공통적인 질문이 통증이나 망상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졸음에 관한 질문도 자주 나옵니다. 수행을 할 때 졸음이 와서 수행을 계속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하시는데, 이럴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역대의 수많은 성자들, 부처님을 비롯하여 사리불 존자 또한 졸음을 이겨 내셨습니다. (그래서) 졸음에 관한 말씀이 매우 많습니다. 졸음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가 많습니다.

 

졸음은 수행 중에 맞이하는 불가피한 손님입니다. 통증과 망상처럼 졸음도 알아차릴 대상이라서 법입니다. 법은, 있는 현상이라서 없애야할 대상이 아니라, 있으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통증과 망상에 비해 졸음은 조금 더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졸음에 빠졌다는 것은 이미 노력이 약해진 상태고, 알아차리는 힘도 감소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기가 어렵지만 이것을 못마땅해 하면 안 됩니다.

 

수행자들이 졸음 때문에 수행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졸음도 수행 중에 나타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졸음에 대처하는 방법과, 사전에 졸음을 예방하는 방법을 함께 알아야 하겠습니다.

 

졸음이 올 때는 ‘졸음이 왔네’ 라고 졸음이 온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연스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이때 중요한 것은 졸음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 제가 몸부림을 치며 졸음과 싸워 봤습니다. 그러다가 더 빨리 졸음에 빠집니다. 이렇게 싸우다가 자면 숙면도 취하지 못합니다. 졸음과 싸워서도 안 되지만 졸음이 오는 것에 마음을 맡겨서도 안 됩니다.

 

졸음이 올 때 그 마음을 보면 ‘자 버리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망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망상을 알아차려야 하지만 망상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망상을 즐깁니다. 어느 때는 좌선하기 위해서 앉았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라 30분을 망상에 빠져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졸음이 왔을 때도 거의 ‘자 버리자’ 라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 경우에는 졸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졸음이 올 때는 졸음에 저항하지도 말고, 졸음을 좋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졸음을 법으로 본다는 뜻은 ‘졸리네’ 하고 그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졸리네’ 하는 것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졸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졸음이 오는데 어떻게 안 졸 수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졸 때 졸더라도 단지 나타난 현상을 알아차리자는 것입니다. 졸음이 온 뒤에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거의는 마음이 졸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보다는 ‘잠을 자 버리자’ 하고 알아차림을 포기 합니다.

 

그런 뒤에 몸으로 와서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리거나, 몸이 가지고 있는 나른함, 무거움을 알아차립니다. 졸음이 왔을 때의 마음은 희미해지는데, 그러면 희미한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졸음을 좋아하고 있네’ 하는 마음을 보고, 안 졸려고 하지 말고 졸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몸으로 오면 나른한데, 나른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보통의 경우 피곤해서 졸음이 옵니다. 저는 어느 경우에 법문을 오래 하고 잠시 쉴 때, 피곤이 몰려와, 피곤함이 목까지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 잠시 저 스스로 피곤을 해결하는 방법은 피곤에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피곤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새로운 마음이 치유를 합니다.

 

금방 피곤이 사라져서 언제 피곤했나 싶게, 법문이 끝나고 인터뷰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다시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어떤 일에 알맞게 대처하는 방법이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졸음이 왔을 때, 두드러진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졸음이 왔을 때는, 졸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졸음과 투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졸음을 알아차릴 때는, 수행을 해서 정신이 맑고 몸이 가벼운 상태를 원해서는 안 됩니다. 졸음이 왔을 때는, 졸음이 왔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좋은 것만 바랍니다. 이런 상태를 알아차리다가 졸면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은 한 시간 좌선에 망상이 떠오르고 통증이 오고, 하기 싫어지고, 부대끼고 하다가 깜빡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깨서 보면 수행시간이 10분가량 남아있거든요. 그런 경우에 그 10분은 매우 위대한 10분입니다. 불필요한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 깨끗한 마음,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깨끗한 마음입니다. 이때는 잠을 자도 숙면입니다. 이왕이면 오는 잠을 잘 자기 위해서라도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고 다시 수행을 하면 짧은 시간이라도 훌륭한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1. 오늘부터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사념처 수행 중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이라고 하면 몸이나 마음에 대해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알기가 쉬운데,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하면 조금은 생소한 감이 있습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어떤 것인가요?

 

- 보통 느낌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마음을 보는 수행과, 그 마음 때문에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별도로 했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념처 중에서 기본적으로 몸의 호흡을 보는 신념처 수행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느낌을 보는 수념처 수행은 잘 못합니다. 고앵까 스승이 몸의 느낌을 보는 수행을 하시는데, 마음과 연계해서 느낌을 보는 수행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마음을 보는 수행을 하고, 느낌을 보는 수행을 별도로, 장르별로 수행을 했습니다. 그래서느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신, 수, 심, 법 사념처 중에서 오늘부터는 느낌을 보는 수행인데, 경전의 내용은 매우 짧습니다. 이 느낌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상당 부분 감추어져 있습니다. 느낌을 알지 못하면 수행에 대한 이해와, 해탈의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도 하고, 한문으로는 사념처 수행이라고도 하는데, 사념처는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 네 가지 중에서 몸, 마음 그리고 정신과 물질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여기에 느낌과 법이라는 것을 넣었습니다. 생소하지만 의미가 있습니다. 왜 불필요한 것을 넣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도 몸과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상과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느낌도 함께 있습니다. 아는 것이 느끼는 것입니다. 아는 마음이 워낙 강하므로 느낌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아는 마음보다는 느낌이 우리를 조정합니다. 그러므로 느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느낌을 부처님께서 찾아내어 알아차리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느낌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느낌 때문입니다. 술 마시고 싶은 것, 느낌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것도 느낌입니다. 돈을 벌고 싶은 것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 또한 느낌입니다. 좋거나 싫은 것이 다 느낌입니다. 지각이라는 상(想)과 수(受)라는 느낌이 함께 들어와서 더 좋거나 싫은 느낌이 1단계, 2단계, 3단계로 자꾸 상승 시킵니다.

 

술이 술을 먹는 것도 느낌이 느낌을 자꾸 강화하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자꾸 도둑질을 하는 것도 느낌이 이끄는 것인데, 짜릿하고 스릴 있는 그 느낌 때문입니다. 마약이나 노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이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리면 욕망이 일어나지 않아서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연기가 회전하지 않을 때 윤회가 끝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욕망은 느낌을 바탕으로 일어납니다. 처음 일어난 느낌에서 더 좋은 느낌을 바라는 것이 욕망입니다.

 

이 욕망을 갈애라고 하는데, 갈애가 일어나면 집착을 하고 새로운 행위를 해서 결국은 욕망의 덫에 걸립니다. 시작은 갈애인데, 이 갈애는 느낌 때문에 일어납니다. 욕망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욕망을 일으키는 느낌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차츰 느낌에 대해서 알면 놀라운 사실들이 많습니다.

 

 

2. 부처님께서 느낌을 찾아내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요?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에서 수(受)가 느낌인데, 이것을 발견하셨다는 것인가요?

 

- 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발견 하셨습니다. ‘수(受)’ 가 감각, 느낌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발견입니다. 미린다왕문경을 보면 나가세나 존자와 미린다 왕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미린다 왕이 그리스 사람인데, 인도를 지배 했습니다. 이분이 매우 통찰력이 뛰어난데 아라한들, 승려들을 불러놓고 조소하며 비웃고 매우 어려운 질문을 하여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취미로 삼기로 유명한 왕이었습니다.

 

많은 무리 속에서 나가세나 존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훌륭한 아라한인 나가세나 존자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냅니다. 대단한 만남이지요. 아라한이 무엇이든 다 아는 사람은 아니고 자신의 번뇌를 해결한 사람입니다.

 

미린다 왕이, 부처님이 그렇게 뛰어나다는데 무엇이 그리 뛰어나냐고 물으니, 나가세나 존자가 “부처님은 매우 뛰어나신 분입니다. 여기 손에 갠지스 강물을 한 움큼 쥐고 이 물이 어느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라고 무수한 골짜기를 밝히는 것보다, 부처님이 마음과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있다고 밝히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인 마음은 비 물질입니다. 물질은 눈에 보이므로 분석할 수 있으나, 비 물질인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에 대해서는 부처님의 위대함이 아니면 말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수, 상, 행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최고의 혜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부처님은 이 느낌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욕망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면 연기가 회전하고 윤회를 합니다. 그 관문이 느낌입니다. 부처님은 최고의 지혜로 오온을 분석했지만, 이러한 분석은 치유에 목적을 둔 것입니다. 부처님의 분석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싶어도, 좀 들으셔야 합니다.

 

인간이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무더기가 작용해서 살고 있다고 알면, 인간은 어떤 특정한 힘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무더기의 역할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초월적인 존재는 사라집니다. 비밀이 벗겨집니다. 느낌을 비롯하여 상이라는 기억, 행이라는 의도를 포함한 오온이 있어 살고 있다고 알고, 어떤 조건을 성숙시켜서 생긴 삶, 조건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알면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아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오온을 분석해서 어떤 자아가 있어서 이를 이끄는 것이 아니고, 어떤 조건들이 있어 살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알면 자연스럽게 무아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오온을 분석하신 것은 치유에 목적을 둔 것인데, 그 치유는 자아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무아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3. 마음이 있고,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이 느낌이라는 수(受)는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요?

 

- 이 오온이 매우 중요하고 핵심인 정신과 물질이지만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해가 조금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에서 색(色)은 몸을 말하는 물질입니다. 여기에서 보통 몸이라고 할 때는 사념처에서만 몸이라 하고, 나머지는 전부 물질이라고 말합니다. 색이라고 하면 물질입니다. 몸이라고 할 때는 빨리어로 ‘까야(kaya)’ 인데, 경전에서는 ‘루빠(rūpa)’ 즉, 물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 상, 행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것은 마음과 함께 있고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며 마음을 따릅니다. 그리고 식(識)은 아는 마음입니다. 여기 마음의 작용에서 말하는 수(受)가 바로 느낌입니다. 그리고 상(想)은 지각, 인식, 표상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헛것을 보는 것이 다 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뛰어난 창작을 하는 것도 상의 기능이 강한 것입니다. 꿈도 상의 기능입니다. 무언가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표상, 니미따(nimitta), 영상으로 만드는 것, 모두 상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행(行)은 의도, 마음의 형성력입니다. 식(識)은 단지 아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단지 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이 모여 사는 것인데, 이 무더기들이 각각의 역할을 합니다. 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소멸합니다. 따로따로 떨어져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오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에서 다루고, 여기서는 느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식이라고 하는 아는 마음과 수, 상, 행이라고 하는 마음의 작용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식이라고 하는 마음은 대상을 받아들여 아는 기능밖에 못합니다. 이것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인 느낌이 일어나면 이것을 마음이 압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마음도 똑같이 즐거운 느낌을 받아들여서 압니다. 마음은 아는 기능밖에 없기 때문에, 앞에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무엇을 만드느냐에 따라 단지 마음은 받아들여서 알뿐입니다. 마음은 억울합니다. 어떤 느낌이 일어나면 조건 없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 탓이 아닙니다. 느낌 탓입니다.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그리고 덤덤한 느낌인 무지의 느낌이 있는데,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마음은 당연히 즐겁습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마음은 받아들여 괴로워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과 느낌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스린다고 할 때는, 사실 마음을 결정하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받아들여서 아는 기능밖에 없기 때문에, 막연하게 마음, 마음 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 마음을 봐서 별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마음을 보는 효과도 있습니다만, 더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앞서서 작용하는 마음의 작용인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느낌뿐만 아니라 상의 기능도 똑같습니다. 상은 무엇을 인식하거나 지각하는 것인데, 이 인식, 지각이 의식은 아닙니다. 의식은 아는 마음이고 인식, 지각은 고정관념입니다. 선입관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본다... 우리는 고정관념을 갖고 봅니다. 상추밭에 똥 싼 강아지를 볼 때, 그 강아지만 보면 상추밭에 똥 싼 강아지로만 봅니다. 잠재의식입니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 능력과 똑같습니다. 그 선입관으로 봅니다. 그러면 마음이 똑같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알 뿐입니다. 마음이 죄가 아닙니다.

 

또 어떤 불순한 의도나 선한 의도가 일어났을 때, 의도가 일어나는 행(行)을 마음은 받아들여 그냥 알뿐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도 중요하지만 마음에 앞서서 이끄는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일으키고 있는 것들을 먼저 알아차려서, 이것들이 사전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수행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지 아는 기능만 하기 때문에 원래 청정합니다. 여러 가지 느낌이 일어나면 마음은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기 때문에, 느낌에 따라 마음도 변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나쁘게 물들이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비로소 마음이 청정해질 수 있습니다. 나쁜 느낌을 가지고 있는 한, 마음은 결코 청정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 대상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은 번뇌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좋은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 순간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이러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 마음과 느낌을 구분하기가 다소 어려운데요...

 

- 계속 들으셔야 합니다. 마음과 느낌은 다르지만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느낌을 보는 수행을 할 때는 느낌 쪽으로 돌려야 합니다. 느낌은 맨 느낌, 육체적 느낌, 정신적 느낌이 있습니다. 느낌은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다섯 가지, 여섯 가지......백팔 번뇌가 느낌입니다.

 

앞으로 느낌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 느낌을 어떻게 알아차리는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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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글쓴이 : 한국 명상원 원글보기
메모 :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3.1.4. 금요일 오후 5시 10분

                         지금은 수행시대-위빠사나 14

 

진행 : 이명학

대담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묘원 법사님

 

 

2013년 1월 4일 금요일 오후 5시 10분

 

-(청취자 질문)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저 호흡을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호흡을 어떻게 알아차리는지, 그리고 수행을 할 때 호흡 하나만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되는지 궁금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여러 가지 대상이 있습니다. 몸에서는 호흡이 가장 두드러진 대상입니다. 생명은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으며 살아있는 동안은 항상 호흡이 있습니다. 이렇게 호흡이 가장 두드러진 대상이고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좋아서 모든 수행자들이 호흡을 주대상으로 삼습니다. 부처님을 비롯해서 벽지불, 성자들, 아라한들이 전부 이런 이유로 호흡을 알아차려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호흡이 주대상이라고 해서 항상 호흡만 알아차리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몸이 정지되어 있을 때, 움직이지 않을 때, 그런 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몸을 움직일 때는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시도때도 없이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닙니다.

 

걸을 때는 발걸음을 봐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어떤 동작이 정지되어 있을 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호흡뿐만 아니고 느낌이나 마음도 똑같이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경전에서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코의 들숨과 날숨, 아나빠나 사띠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배의 움직임을 호흡으로 알아차리셨습니다. 이게 대단히 절묘한 선택이었다는 후평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코의 호흡을 잘못 알아차리면 상기가 올 위험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집중하다 보면 피가 머리 쪽으로 몰립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 아랫배의 호흡을 알아차리게 한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평이 있는 반면 경전에 없는 방법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부처님의 코의 호흡이나 마하시 사야도의 배의 호흡을 막론하고 코, 가슴, 배 또는 몸의 일부 그리고 전면(마음자리) 등 어디고 두드러진 곳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호흡을 저는 보게 합니다. 그 이유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의외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알아차린다고 해도 세 번 이상 보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거기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꿩 잡는 게 매라고, 꼭 어디라고 한정하지 않고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데서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몸이 아닌 마음자리에서 마음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호흡을 알아차리는 위치가) 꼭 몸이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위치를 선택했습니다. 화가 났을 때는 가슴에 콩닥거리는 느낌과 함께 두근거리는 호흡이 있습니다. 그때는 가슴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위치에 관계없이 강한 곳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호흡은 반드시 일어남과 꺼짐이라는 하나의 상승하는 것과 하강하는 것, 부푸는 것과 꺼지는 것을 한 사이클로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유용합니다. 그냥 호흡이 아니에요. 일어남과 꺼짐으로. 왜냐하면 그 속에 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남의 요소가 다르고 꺼짐의 요소가 다릅니다. 그러면 호흡이 맛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풍선에 바람을 불었을 때 부푸는 느낌과 픽~ 꺼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람의 요소입니다. 이렇게 느낌으로 보면 호흡의 질감이 느껴져 호흡을 붙잡기가 좋습니다.

 

그리고 호흡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하면 안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이기 때문에 대상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일정기간 숨을 멈추고 일정기간 숨을 들이쉬면 몸의 리듬이 깨져서 치명적으로 건강을 해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오래 동안 해왔습니다. 이런 수행으로 인해서 건강을 해친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호흡으로 건강을 해친 사람은 치유가 어렵고, 호흡으로밖에 치유가 안됩니다. 제가 미얀마에서 수행할 때, 호흡으로 인해서 건강을 잃은 사람들이 미얀마에 와서 치유하는 것을 봤습니다. 오래 동안 호흡을 만들어서 했기 때문에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호흡은 생체조절 능력이 있습니다. 거칠게 쉴 때는 그만큼 산소가 필요하고, 고요해지면 호흡이 느려집니다. 그렇게 자연스런 호흡이 우리 건강을 돕는데,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하면 리듬을 깨는 것이라서 위험합니다. 호흡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하는 사람들이 인위적인 호흡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깨달음으로 아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위험합니다. 호흡을 만들어서 하면 자체의 리듬이 깨지기 때문에 피곤하고 심하면 탈진합니다. 호흡을 만들어서 하면 상기의 위험이 있고 또 법을 볼 수 없습니다. 호흡에는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이 있는데, 개입을 하면 이 무상의 법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호흡에서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개입하지 말고 놓고 분리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호흡을 알아차리다 보면 호흡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느낌을 보아야 하는데, 이 느낌도 사라집니다. 느낌이 사라지면 아는 마음만 남는데, 그 후 아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열반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먼저 호흡을 잡는 것이 유익하고, 이런 내용을 잘 숙지하셔서 자연스런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청취자 질문)위빠사나와 참선, 어떻게 다른지 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수행인데, 분리해서 보는 수행입니다. 수행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마타는 대상과 하나 되어서 선정의 집중력을 얻는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분리해서 무상, 고, 무아를 보는 수행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수행을 이 두 가지로 보면 됩니다. 대상과 하나 되어서 선정의 고요함을 얻는 수행, 여기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위빠사나는 집중이 아닌 지혜수행이라서 대상을 분리해서 법을 보는 수행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함께 응용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수행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하고, 그러다가 호흡이 보이면 호흡을 알아차리고 호흡의 느낌을 보면 또 위빠사나로 넘어옵니다. 그것은 전문적인 스승의 지도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지난 시간에 전생과 내생은 없고 단지 원인과 결과만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연기의 법칙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윤회는 몸만 바꾸는 환생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새로 태어나는 재생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라한이나 부처님이 열반을 하신 뒤에 현재 어디에 계시다거나, 또는 어디에도 계시지 않다거나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아라한이나 부처님께서 열반을 하신 뒤에도 원인이 사라져 결과가 없다고 하는 것이 바른 견해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다거나, 또는 계시지 않다거나 하는 이분법적인 논리로는 우리가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에 대한 바른 답변은 오직 불교적 논리로만 가능합니다. 고타마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원인이 사라져 결과가 없어진 것으로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리입니다. 이걸 부처님이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있다거나 없다는 논리로만 접근하려고 하는데, 이때도 원인과 결과로 보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는 기존의 시각과 전혀 다른 제3의 시각입니다. 이 제3의 시각이 지혜의 시각입니다. 불교는 기존의 시각이 아닌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이런 출발을 해야 궁극의 깨달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출발은 깨달음으로 가는 첫 번째 지혜입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그래서 연기는 모든 수행의 기본도라고 합니다. 이런 기본도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교의 많은 교리가 상반됩니다. 기본도가 전제될 때 상반되지 않고 맞아 떨어집니다.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논리는 존재론이고, 이러한 존재론은 관념입니다. 관념으로는 통찰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불교에서는 인식할 수 있을 때라야 실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인식론을 채택합니다. 이런 인식론이 실재입니다. 존재로 보면 실체가 있지만 인식으로 보면 실체가 없습니다.

 

빨리어 경전 맛지마 니까야에 순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한문으로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이란 말이 상좌불교에는 없고 대승에서만 있는 용어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공이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사용하신 빨리어 ‘순냐’가 한문으로는 공(空)이고, 텅비어 있다, 공허하다, 비실체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을 존재로 보면 실체가 있고 인식으로 보면 실체가 없습니다. 空으로 보면 실체가 없고 존재로 보면 空이 부정됩니다. 인식은 느낌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일어나고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어떤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실체라고 합니다. 전생과 내생이 있지만 실재로 보면 단지 원인과 결과만 있습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공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빨리어 ‘순냐’ 즉 공(空)이라는 말은 없다는 뜻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실체가 아닌 비실체, 관념이 아닌 실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실체가 아니라고 해야 항상 하는 자아가 없어서, 단지 그 자리에는 원인과 결과만 있다고 귀결되어서 부처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하는 문제에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금도 부처님께서 어디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생각은 좀 잘못되었군요.

 

-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만약 어디에 계신다면 부처님께서 어디에 있는 나를 보라고 하셨겠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열반한 뒤에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나를 보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여기서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생담을 보고 부처님의 수많은 전생을 하나의 생으로 이해하는 잘못을 범할 소지가 있습니다. 한 생 한 생이 전혀 다른 생입니다. 단지 원인과 결과의 과보가 상속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본생담은 무수한 부처님의 생이 몸만 바꾼 것으로 알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해서 한 부처님의 마음이 몸만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거기에는 항상 한다는 상견이 있습니다. 무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본생담에서 우리에게 과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한 말을 하나의 생명이 계속 상속되는 것으로 알면 원인과 결과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계셔야 해요. 영원히. 그러면 해탈이 없고 열반이란 게 있을 수가 없어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완성된 성인이 부처님과 벽지불과 아라한, 셋으로 나누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들 성인에 반열에 오른 성자 중에서 부처님과 벽지불과 아라한은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부처님과 벽지불을 붓다라고 하고요, 아라한은 붓다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세 분이 같은 점이 있고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삼마삼붓다라고 하는데,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자,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자-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각)를 얻은 자-붓다에 대한 칭호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붓다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여 전지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선하다고 해서 전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전지 전선하되, 전능하지는 않다. 그런데 부처님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가 불타서 윤회가 끝납니다.

 

벽지불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데,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법을 펴지는 못합니다. 혼자 왔다 가십니다. 그런데 벽지불도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가 불타서 윤회가 끝납니다. 부처도 윤회가 끝나고 벽지불도 윤회가 끝납니다. 아라한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법이 살아있지 않는 시대에는 아라한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부처가 말씀하신 수준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가 불타서 윤회가 끝나는 것은 붓다와 똑 같습니다. 그러니까 세 분은 윤회가 끝나는 것이 똑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되기 어려운 붓다가 되려고 하지 말고 나와 똑같이 윤회가 끝나는 아라한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라한이 되지 않고 붓다가 되기를 원한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수다원이 되면 일곱 생 이내에 윤회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붓다가 되려는 사람은 수행을 하면 안되고 바라밀 공덕만 쌓아야 됩니다. 그래서 조건이 성숙되면 부처로 출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택입니다. 붓다나 벽지불이나 아라한은 선택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고 이런 선택의 기준이 있습니다.

 

 

 

출처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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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2.12.21 금요일 오후 5시 10분

                         지금은 수행시대-위빠사나 12

 

진행 : 이명학

대담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묘원 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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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오후 5시 10분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림을 확립하면 누구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열반을 성취하면 수다원이 되고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번뇌가 소멸한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수다원이 되고 일정기간의 수행을 한 뒤에 다음 단계인 사다함의 도과를 얻기 위해서 다시 같은 수행을 새롭게 시작한다고 하셨는데, 이때도 수다원이 되는 과정에서 경험한 것을 동일하게 경험하는지요?

 

-네, 그렇습니다. 수다원에서 사다함의 과정을 위해서 수행을 시작하면, 수다원이 되기 전에 있었던 몸과 마음의 현상이 다시 똑 같이 나타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이 되풀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고질적 성향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일단 번뇌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알아차렸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 번에 씻은 듯이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수다원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전하게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은 이런 반복적 과정을 거쳐서 차츰 더 정화되어 갑니다. 이런 과정은 인간의 몸과 마음에 내재되어있는 업의 과보가 하나씩 벗겨져 나가는 과정입니다. 자신의 몸도 업의 과보물이며, 마음도 업의 과보물이라서 잠재적 성향이 많습니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업의 과보가 한 꺼풀씩 차츰 벗겨져 나갑니다.

 

우리가 어려서 말을 배울 때 엄마라는 말을 무수히 해서 비로소 엄마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처럼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대상을 반복적으로 알아차려서 집중이 되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이 생겨 지혜가 조금씩 성숙해나갑니다.

 

어떤 사람이 남보다 지혜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 과정에 이르는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수다원에 이르렀다면 그 사람은 수다원에 이를 만한 충분한 조건이 성숙되어서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은 과정이고, 반복적으로 수행을 할 때만이 더 높은 단계의 지혜가 성숙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내라고 합니다. 바로 인내가 열반으로 이끕니다. 이 인내는 믿음과 노력이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 단계인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첫 번째 단계인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했을 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사다함도 수다원이 갔던 과정의 지혜를 똑같이 밟아나갑니다. 다만 깊이가 전과 다르겠지요. 사다함도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서 집착이 끊어진 상태에서 열반에 이릅니다. 그런데 수다원 때보다 좀 더 깊게 무상, 고, 무아를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사다함의 지혜의 수준으로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바로 이 차이가 도과의 단계를 구별합니다.

 

사다함을 일래과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다함이 되면 한 번 더 인간으로 태어나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를 끝낸다는 뜻입니다.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욕망의 세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열 가지 족쇄 중에서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이 수다원보다 조금 더 사라집니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과 악한 의도가 약해집니다. 그러니까 지혜의 차이에 따라 차츰 소멸되어 가는 것이 분명해 지고 또 소멸되는 것이 많아집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를 인간을 존재의 세계에 붙들어 매는 족쇄 중에서 낮은 단계의 족쇄라는 뜻으로, 한문으로 오하분결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은 번뇌가 소멸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살펴보면 사다함이 되면 수다원이 미치지 못한 영역인 감각적 욕망과 악한 의도가 약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과 자신이나 남에 대해서 나쁜 마음을 먹는 것이 줄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자가 되어서 도과의 두 번째 단계가 되어도 여전히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을 미워하거나 비난하는 마음을 아직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잠재되어있는 고질적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 이런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나무랄 입장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성자가 되었다고 해서 범부를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아직 사다함도 욕망과 악한 의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자신이나 남을 모두 이해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수다원에 이르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나고, 사다함이 되면 다시 한 번 인간으로 태어나서 아라한이 된다고 했는데, 도과 하나의 차이로 상당한세월동안 더 살아야 하는군요. 이런 사실로 인해 수다원이 되면 사다함이 되려고 더 노력하겠는데요. 어떻습니까?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수다원이 되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된다면 앞으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몇 백 년은 더 살아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 숫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깨달음은 그 시기를 단축하고 싶다고 해서 단축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조건의 성숙이에요. 그만한 조건이 성숙 되었을 때 그만한 결과가 있습니다.

 

또 깨달음은 자기가 얻고 싶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도과를 성취하고 싶은 의도가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의도를 가지고 얼마나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어요. 또 의도를 가지고 실천한다고 해도 과거에 쌓은 과보가 있어서 방해를 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과보의 조건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안 되면 새로운 선과보를 만들기 위해 바라밀공덕을 쌓으라는 말을 합니다.

 

또 있습니다. 모든 일은 자발적인 것과 유발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자하는 것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과 함께 살기 때문에 상대에 의해 유발되는 것도 있습니다. 내 수행을 방해하는 타인을 만나면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들을 합쳐서 조건이라고 합니다. 되고 싶다고 해서 된다면 누구나 이생에 붓다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수행을 만났습니다. 이것만해도 훌륭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좋은 스승을 만나 앞으로 노력하면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 태어나 부처님과 가까이 살았다고 해도 반드시 이 수행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인연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수행을 만나고, ‘아, 이 생에는 이걸 잡아야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낸 것입니다.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한 뒤에 아나함의 도과를 향해서 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아나함이 되면 사다함과 다르게 어떤 지혜가 성숙되는지요?

 

-아나함도 역시 마찬가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어서 집착이 끊어진 상태로 아나함의 열반에 이릅니다. 아나함은 성인의 세 번째 단계인데, 불환과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도를 말합니다. 아나함이 되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천상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거기서 수행을 하여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납니다.

 

정거천은 색계 사선정의 세계인데 무변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색구경천이라는 다섯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곳의 수명은 천상의 햇수로 천 대겁에서부터 만 육천 대겁까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명이 매우 깁니다.

 

원래 색계와 무색계 천상에는 괴로움이 없고 행복만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서도 행복이 없고 괴로움만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수행은 오직 인간이 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서만 부처가 나오며, 인간이 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에서 유일하게 정거천에서만 수행을 해서 윤회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욕망의 세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열 가지 족쇄 중에서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가 사라집니다. 앞서 사다함에서는 감각적 욕망과 악한 의도 약해지지만 아나함이 되어야 비로소 사라집니다. 그러나 아직 색계에 대한 욕망이 남아있기 때문에 다시 색계에 태어납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아 욕망을 끊기가 얼마나 어렵고 그래서 윤회를 끝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진 욕망과 남을 미워하는 악한 의도가 아나함이 되어야 비로소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각적 욕망과 악한 의도로부터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때가 되어야 사라지니까 수행자들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남을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직 아나함이 안되었잖아요. 수행자가 아나함이 되었을 때는 반드시 독립된 생활을 하거나 출가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부부생활을 하면 일주일 이내 죽어서 정거천에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감각적 욕망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부부관계가 견디기 어렵습니다. 세속과는 파장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전에 보면, 어느 왕비가 아나함이 되었는데, 부처님께서 왕에게 얘기를 합니다. 당신의 부인인 왕비가 아나함이 되었으니 출가를 시키라고 권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 이내에 죽는다고 하셔서 출가를 시킵니다. 그러므로 아나함이 되었을 때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고 악한 의도가 사라집니다. 무엇이나 단계적 과정에 의해서 소멸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되겠습니다.

 

 

-성인의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이 되면 어떻게 달라지는가요?

 

-아라한도 역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어 집착이 끊어진 상태에서 아라한의 열반에 이릅니다. 이때 아라한은 아나함과 달리 완전하게 무상, 고, 무아를 알기 때문에 모든 욕망이 완전하게 제거됩니다. 아라한은 다른 단계의 도과를 얻은 수행자와 달리 완전하게 무아를 알아야 합니다. 아나함은 완전하게 무아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직 색계 선정에 태어나는 갈애, 욕망이 있습니다. 완전하게 무아를 알지 못하는 한 감각적 욕망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소멸되어야 집착이 끊어져서 새로운 업을 생성하지 않아서 미래의 태어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하게 윤회가 끊어집니다.

 

이러한 아라한을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는 말로, 한문으로 응공이라고 합니다. 아라한이 응공입니다.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자-이게 탁발하던 시대에 걸맞는 용어인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라한은 최고의 지혜가 났기 때문에 온전하게 남을 위해서 삽니다. 그러므로 공양을 받을 가장 훌륭한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공양을 할 때 공양을 받는 상대에 따라 보시의 공덕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지혜가 난 아라한한테 공양을 올리면 최고의 공덕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아라한을 해치면 그 불선의 과보가 큽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성자를 해친 것은 그만큼 불선업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덕도 상대에 따라서 이롭기도 하고 그만큼 해롭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 것과 평범한 사람에게 위해를 가했을 때 받는 벌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살생의 과보도 지혜가 있는 사람을 해치면 그만큼 불선의 과보가 큽니다.

 

일반적으로 불교도들이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도 공덕이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공양을 받아서 수행을 하기 때문에 그 공양이 가장 선한 일에 쓰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올린 공양보다 공덕이 더 증장됩니다. 그래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아라한을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고 해석합니다.

 

 

-아라한이 되면 아나함에서 소멸된 족쇄보다 더 많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요?

 

- 아라한이 되면 인간의 수행을 가로막는 열 가지 족쇄가 완전하게 소멸됩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오하분결이 사라지고 오상분결도 사라집니다. 여기서 오상분결이라는 것은 색계, 무색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족쇄입니다. 색계, 무색계를 범천계라고 하는데, 색계는 사선정의 세계가 있고 무색계도 사선정의 세계가 있습니다. 색계 초선정의 수명은 무량겁이며 무색계 4선정인 비상비비상처천의 수명은 8만 4천 대겁이라서 매우 깁니다. 그러므로 이런 곳에 태어나는 것이 그렇게 행복은 아닙니다. 거기는 불행이 없기 때문에 행복도 행복인 줄 모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비상비비상천에서는 8만 4천 대겁을 사는데, 너무 오래 살기 때문에 자기도취에 빠져서 자기를 신으로 압니다.

 

색계, 무색계의 다섯 가지 족쇄는 색계에 대한 욕망, 무색계에 대한 욕망, 아만, 들뜸,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니까 윤회가 끝나는 출세간적 입장에서 보면 천상에 태어나고자 하는 것도 욕망이며 족쇄입니다. 우리가 천상에 태어나면 좋은 줄 알지만 그곳에서 수명이 끝나면 다시 어디에서 무엇으로 태어날지 모릅니다.

 

 

출처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글쓴이 : 한국 명상원 원글보기
메모 :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

                      THE BUDDHA, A SHORT STUDY OF HIS LIFE AND TEACHING



                                                        삐야다시 스님(PIYADASSI THERA )지음 / 정원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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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분 세존 응공 정등각께 귀의합니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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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삐야다시   스님은 스리랑카 태생으로 출가 전에 날란다 대학과 스리랑카 대학에서 수학했다. 20세에 득도, 스리랑카의 저명한 고승인 와지라냐나 상가 나야까(Vajiranyana Saṅgha Nayaka) 스님 밑에서 불법을 닦았음. 현재는 스리랑카 지도급 승려로서 힘있는 설법과 라디오 전파를 통한 포교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서양을 널리 여행하면서 불법의 메시지를 전하는 한편, 여러 국제 종교회의와 문화적인 모임에 남방불교 대표자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스리랑카 불자출판협회(Buddhist Publication Society, BPS) 간행시리즈의 싱할리어 본(本) 출판물 「Dams-ak」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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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그분


“세월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부처님은 조금도 멀리계시는 것 같지가 않다. 그분의 목소리는 지금도 우리들의 귓전에 속삭이듯 일러주고 있다. 삶의 투쟁에서 도망치지 말고 냉철한 눈으로 맞서라고. 그리하여 이생에서 보다 큰 향상과 성숙을 위한 기회를 찾으라고.


인격이야말로 예나 다름없이 지금도 값진 것이다. 더욱이 부처님처럼 인류의 뇌리에 깊은 감동으로 아로새겨져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무언가 생기가 약동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분으로 참으로 경이로운 분임에 틀림이 없다.


바르트(Barth)가 ‘그 분이야말로 고요하고 부드러운 위엄을 지닌 분으로, 살아 숨쉬는 그 모두에 대한 자비심과 고통받고 있는 모두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지닌 분이다. 그리고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완전한 도덕적 자유를 성취한 분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귀감이다.’라고 말하였듯이.”


그 분의 메시지는, 형이상학적인 미묘한 문제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낯익은, 그러면서도 항상 새롭기만한 근원적 메시지로서, 지성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깊은 귀의를 받았었다.”


불교는 인도의 바라나시(베나레스)시(市) 근처의 사르나트에서 탄생하였다. 처음에는 겨우 다섯의 제자와 더불어 시작됐지만 해가 지나면서 수많은 나라로 전파되었고 오늘날에는 6억이 넘는 인류가 신봉하는 대종교가 되었다. 이렇듯 불교가 장족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가치와 합리적 정신에 호소하는 설득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불교의 발전을 도운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법을 전하는 사람들이 불교를 폄에 있어서 결코 삿된 방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는 점도 그 요인 중의 하나이다. 그들이 사용한 유일한 무기는 바로 보편적인 사랑[慈]과 연민[悲]이었다.


또 다른 나라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신앙을 깨뜨리지 않고 평화롭게 전해졌다는 점 또한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종교사상 유례가 드문 대대적 전교사업을 펴면서도 무력이나 강제적 수법, 그 밖에 어떤 비난받을 방법도 쓴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강제에 의한 개종은 불교도들에게는 낯선 얘기이며, 부처님이나 그 제자들이 지극히 못마땅하게 여겼던 일이었다. 불교가 다른 종교를 헐뜯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그처럼 평화로웠기 때문에 불교는 문명세계의 다양한 문화권 속으로 널리 전파될 수 있었다.


리스 데이비즈 박사는 말한다.

“내가 알기로는, 불교의 긴 역사를 통틀어 불교도들이 아무리 장기간에 걸쳐 득세를 한 곳일지라도 타종교인을 박해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탄생


이 위대한 종교,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님께서는 2500여년 전에 살았었고,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h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 분의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는 크샤트리아(무사)계급에 속한 왕으로 현재 네팔 국경지역 근처의 까삘라와투[迦毘羅城]에서 샤카[釋迦] 족의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고따마 가문 출신이었으므로 고따마 숫도다나라고 불리었고 그의 비(妃)는 이웃 꼴리야 족의 공주 마하마야였다.


오월 보름날, 때는 봄철, 나무는 잎과 꽃․열매가 무성하고 사람과 새․짐승들이 모두 즐거움에 젖어 있을 때였다. 그때 마하마야 왕비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성대하게 꾸민 마차를 타고 까삘라와투를 떠나 친정인 데바다하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은 중도에 끝나 버렸다. 왕비는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우수 아래서 아들을 낳았다.


룸비니(현 지명은 룸민데이)는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백마일 거리에 있으며 눈 덮인 히말라야의 영봉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그로부터 316년 후 아쇼카 황제는 싯닷타 왕자가 태어난 성지임을 표시하는 거대한 석주를 세웠다. 석주에는 아쇼카 문자 93자로 된 다섯 줄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

(hida budhe jāte Sākyamuni)


이 거대한 석주는 지금도 볼 수 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법사가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다. 그 후 오랫동안 잊혀져 오던 룸비니 동산은 1896년 저명한 고고학자 커닝엄 장군에 의해 발굴, 확인됨으로써 룸비니의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었다.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청하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또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다.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바라문들은 심사숙고한 후 일곱 명은 두 손가락을 펴보이면서 말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전 세계의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되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면 왕자님은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어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현명하고 젊은 콘단냐만은 왕자를 바라본 후 오직 한 손가락만 펴보이면서 말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는 언젠가는 진리를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등각자가 될 것입니다.”


왕자가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어머니 마하 마야 왕비가 세상을 떠났다. 아기는 이모 고따미 빠자빠띠에 의해 양육되었다. 이들이 아기에게 쏟은 정성은 극진하여 아기는 온갖 호강을 다 누리며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왕은 왕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에도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왕자는 갖가지 학문에 능통하게 되었고 무술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싯닷타 왕자는 어린 시절부터 가끔 깊은 명상에 빠져들곤 하였다.



네 가지 충격적인 체험


왕자가 장성하자 부왕은 아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왕실의 훌륭한 후계자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현자 콘단냐의 충격적인 예언이 항상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정말 어느 날엔가 왕자가 훌쩍 집을 떠나 고행자의 떠돌이 생활로 뛰어들까봐 두려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관습대로 왕자를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꼴리야 성의 수빠붓다 왕과 빠미따 왕비의 외동딸이며 왕자의 외사촌인 아름다운 야소다라 공주와 결혼시켰다. 공주는 왕자와 동갑이었다.


왕자의 생활은 참으로 호사스러웠다. 기록에 의하면 왕자는 인도의 세 계절에 맞는 궁전을 각기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세속생활의 즐거움이라면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없는 가운데 춤과 노래, 사치와 쾌락에 파묻혀 괴로움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아들을 쾌락 속에 묻히게 하여 세속에 붙잡아 두려는 부왕의 노력도 결국에는 허사였다. 호기심어린 아들의 눈으로부터 인생의 모든 고(苦)를 감추려는 숫도다나 왕의 노력은 오히려 싯닷타 왕자의 탐구심만 키워 주어 결과적으로 진리와 깨달음을 구하려는 결의를 더욱 굳혀 줄 따름이었다. 철이 들면서 왕자는 차츰 세상의 비애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느 날 왕자가 마부 찬나를 데리고 왕실 정원으로 놀러가다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노쇠한 한 늙은이가 기력이 완전히 쇠잔하여 슬픈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왕자님, 도와주세요. 나를 일으켜 세워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집에도 못가고 죽을 것 같아요.”


이것이 왕자가 경험한 최초의 충격이었다. 또 두 번째는 가죽과 뼈만 앙상하게 남은 버림받은 한 사내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병 때문에 전신의 기력이 탈진되어 인간다운 우아함이나 기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세 번째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화장터로 가면서 비통해 하는 어느 친족들의 장례행렬을 만난 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런 비참한 광경들에 왕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마부의 말에 의하면 그 자신도, 사랑하는 아내 야소다라도, 그 밖의 모든 친척들도, 아니 그 누구도 예외없이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왕자는 한 출가 사문과 마주치게 되었다. 사문은 시선을 아래로 한 채 앞만 바라보며 신중한 걸음걸이로 고요하고도 침착하게, 초연하고도 걸림없는 당당한 자세로 걷고 있었다. 왕자는 사문의 평온한 모습에 깊이 감동되었다.


찬나는 이 사문이, 생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진리를 찾아서 청정한 삶을 살고자 집을 떠나 세속을 등진 사람이라고 일러주었다. 순간 왕자의 마음속에 출가에 대한 깊은 생각들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왕자는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궁중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뇌와 번민에 싸여 답답하기만 하던 마음속에 마침내 한 가닥 서광이 비쳐든 것이다. 궁궐 밖 세상을 접하면 접할수록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왕자는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궁궐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야소다라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나에게 장애(Rāhula)가 생겼구나’ 라고 말하면서 왕자는 궁궐로 들어갔다.


위대한 출가


그날 밤, 달빛은 교교하고 사위는 적막에 잠긴 가운데(그 날은 유월 보름날 저녁이었다) 왕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생의 절정, 젊은 시절은 늙음으로 끝나고, 인간의 감관은 가장 필요할 때에 그를 저버린다. 혈기 왕성하고 건장하던 사람도 병이 나면 정력과 건강을 상실하고 만다. 결국 예기치 못했던 죽음이 갑자기 다가와 이 짧은 일생에 종지부를 찍어버린다. 분명 이 늙음과 병듦으로부터, 이 만족할 수 없는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자 젊음과 건강 그리고 수명에 대해 지니고 있던 교만심(mada)이 그에게서 사라졌다. 이 세 가지 마취(교만)가 헛되고 위험한 것임을 알게 되자 그는 자기 자신과 처자, 그리고 고통받는 일체 중생을 위해, 늙고 병들고 고통받고 죽는 것으로부터 궁극적 해방을 기어이 찾아내어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가 대각(大覺) 성불로 완성되는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이와 같은 깊은 자비심 때문이었다. 위대한 출가를 결심하게 만든 것도, 또 안락한 가정생활이라는 황금새장을 열어젖히게 만든 것도 이 자비심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잠들어 있는 모습에 마지막 눈길을 보내면서도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자비심 때문이었다.

꽃다운 젊은 시절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 야소다라가 그의 하나뿐인 아들 라훌라를 낳은 그 밤에, 그는 아내와 아들․아버지 그리고 권력과 영광이 약속되어 있는 왕좌를 모두 떨쳐버리고 떠나갔다.


이제 수행자의 옷차림을 한 보살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삶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숲속의 고독한 생활로 들어섰다.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평안, 즉 열반을 향한 구도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리하여 위대한 출가는 이루어졌다.


그는 처음에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뿌따라는 유명한 두 현자에게 각기 가르침을 구했다. 그들은 선정의 대가들인 만큼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배우면 높은 선정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보살은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정을 닦았고 마침내 그 선정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바라던 최상의 깨달음은 아니었다. 이 두 스승이 가르치는 지식과 선정의 경지를 보살은 만족할 수가 없었다. 보살은 그의 목표가 아직 요원하다는 것을 느꼈다. 두 현자는 제각기 보살이 그들과 같이 머물기를 바랐다. 후계자가 되어 그들의 교단을 이끌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행자 고따마는 이것을 정중히 거절하고 인사를 드린 후 그때껏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구극의 진리를 찾아서 떠나갔다.


편력 끝에 그는 마침내 가야 지방의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우루웰라에 도착했다. 그곳의 조용하고, 울창한 숲과 맑은 강물이 마음에 들었다. 부근에는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어서 탁발하기에도 안성마춤이었다. 이곳이야말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여겨져 여기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그가 워낙 결연한 각오로 정진에 힘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보고 감복한 다섯 수행자들이 같이 정진하고 싶어 동참해 왔다. 그들의 이름은 꼰단냐, 밧디야, 와빠, 마하나마, 아싸지였다.


 고행


당시 인도에서는 심신을 정화하고 궁극적인 해탈을 얻으려면 극심한 고행이 필요하다고 믿는 수행자들이 많이 있었고, 그 점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행자 고따마는 이 생각이 옳은지 그 진실성을 확인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곳 우루웰라의 숲에서 고따마는 마음이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해탈의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되기를 희구하면서 자신의 육체를 조복받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자신과의 싸움은 그야말로 처절한 것이었다. 나무 잎사귀와 뿌리만으로 연명하였을 뿐 아니라 그 양마저도 극도로 줄여 나갔다. 옷은 쓰레기더미에서 주운 헝겊으로 기워 만든 누더기를 걸쳤으며, 잠은 시체들 옆이나 가시덤불 위에서 잤다. 이 같은 극도의 자기학대로 몸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쇠잔해 갔다. ‘나는 고행을 철저히 했다.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만큼 열심히 했다. 나의 사지는 말라 시들어버린 갈대처럼 되었다. ……’ 후일 부처님은 지난날의 고행담을 이와 같이 감명깊게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다.

 

6년이란 긴 세월을 격렬하게 투쟁한 끝에 거의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원대한 목표에는 단 한 발짝도 더 다가서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행이 얼마나 헛된 짓인가를 체험을 통해 명백하게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분발하여 원래의 목표를 향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처럼 극도로 쇠잔한 몸으로는 어떤 길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고행과 극단적인 단식을 그만두고 다시 정상적으로 음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의 쇠약해진 몸은 이전의 건강을 되찾았고, 고갈되었던 기력도 곧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의 다섯 동료들은 실망한 나머지 그의 곁을 떠나가 버렸다. 그들은 고따마가 정진을 포기하고 사치스런 생활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이런 일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자신의 청정함과 정진의 힘을 확고히 믿고 있었기에 스승의 지도나 도반의 도움없이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최후의 시도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대각(大覺)을 이루시기 바로 전날 오전, 보살이 좌선을 하고 있을 때 부유한 장자의 딸인 수자따가 우유죽을 드렸다. 이 수행자가 신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었던 수자따는 “존귀한 분이시여, 당신의 큰 뜻이 부디 성취되어지이다.”고 기원했다. 이것이 보살이 깨치기 전에 드신 마지막 음식이었다.


 마침내 깨치시다


가야(현재 붓다가야)의 네란자라 강 둑 위에 있는 한 나무 아래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보살은 불퇴전의 결심으로 정진에 마지막 힘을 쏟고 있었다.이 몸이 가죽과 힘줄, 뼈만 남고 피와 살은 다 말라서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등각(正等覺)을 얻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노라.’ 보살의 노력은 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것이었고, 보살의 헌신은 이처럼 시들 줄 모르는 것이었으며, 진리를 깨치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결의는 이처럼 단호한 것이었다.


보살은 출입식념(出入息念 anāpānasati)에 전념하여 초선(初禪)에 들어가 거기에 머물렀다. 다시 차례대로 제2선 제3선 그리고 제4선에 들어가 머물렀다. 이와 같이 마음에서 모든 때를 닦아내어 평온한 마음을 이룬 다음, 이 마음을 과거 생(生)을 기억하는 지혜[宿命智 pubbenivāsānussatiñāṇa]쪽으로 기울였다. 이것이 보살이 초저녁(오후 6시~10시)에 성취한 첫 번째 지혜였다. 다시 보살은 온갖 형태의 중생이 각기 지은 업에 따라 좋은 상태로 또는 나쁜 상태로 태어나고 죽는 것을 아는 지혜[死生智 cuti-upapātañāṇa]쪽으로 기울였다. 이것이 한밤중(10시~새벽2시)에 성취한 두 번째 지혜였다. 다시 그는 번뇌를 소멸시키는 지혜[漏盡智 āsavakkhayañāṇa]쪽으로 기울였다.


그는 여실히 깨달았다. 즉 ‘이것이 고(苦)다. 이것이 고의 일어남[集]이다. 이것이 고의 멸(滅)이다. 이것이 고의 멸에 이르는 길[道]이다.’ 그는 여실히 깨달았다. ‘이것이 번뇌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번뇌의 멸이다. 이것이 번뇌의 멸에 이르는 길이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번뇌로부터 해탈하였다. 그 번뇌란 감각적 쾌락의 번뇌[欲漏 kāmāsava], 존재하려는 욕망의 번뇌[有漏 bhavāsava], 무지의 번뇌[無明漏 avijjāsava]의 세 가지 번뇌였다.그의 마음이 해탈했을 때 해탈했음을 아는 지혜[解脫知見]가 생겼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태어남은 소진되었다. 청정한 삶[梵行 brahma cariyam]은 완성되었고 할 일은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이런 상태에 이르지 않는다.”18) 이것이 새벽녘(새벽2시~6시)에 성취한 세 번째 지혜였다. 이 세 가지 지혜를 삼명(三明)이라 한다.


다시 보살은 승리의 게송을 읊었다.


“‘집[個體] 짓는 이’를 찾아내려고,

그러나 찾지 못한 채

수많은 태어남의 윤회 속을 줄곧 서둘러 왔었네.

태어남은 언제나 실로 괴로운 것.

오, 집 짓는 이여, 드디어 너를 찾아냈도다.

너는 다시는 집 짓지 못하리.

너의 모든 서까래 부서지고

마룻대[上梁] 또한 부러졌도다.

이제 내 마음은

형성되어지지 않은 것(=열반)을 이루었네.

온갖 갈애 다 끝내어 버렸네.”


이렇게 보살 고따마는 5월 보름날(탄생한 날과 같은)  서른 다섯의 나이에, 영원한 진리인 네 가지 성스런 진리[四聖諦]를 완전히 파악함으로써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시어, 일체 중생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위대한 의사, 대의왕(大醫王), 붓다가 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과 구별되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그 분이 사람이라는 점, 즉, 신이라든가 초자연적 존재와 어떤 관련도 전혀 맺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신도 아니고 신의 화신(化身)도 아니며 어떤 신화적 존재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한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비범한 사람, 초인적 사람이었다. 그 분은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을 인간의 지성과 노력의 결과로 돌렸다. 그 분은 직접 체험을 통해 인간이 그 어떤 존재보다도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어떤 스승으로부터, 그것이 사람이든 신이든 간에 일체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꾸준한 정진에 의해서 보살은 최고의 정신적, 지적 성취를 달성했다. 청정의 극치에 이른 것이며 인간성이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자질을 완성해 낸 것이다. 문자 그대로 지혜와 자비의 구현자였고, 이 지혜와 자비는 그 후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두 가지 기본 지침이 되었다.


부처님은 결코 계시 종교에서처럼 영혼을 구제하는 구세주로 자처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해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을 계발하여 현실화시키는 길은 오직 인간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과 깨달음을 통해 실증해 보이셨다. 이처럼 부처님은 깨달음과 해탈이라는 지상의 과제가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이 가 닿는 범위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셨던 것이다.


사실,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의 도움과 관계없이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 더구나 각자가 자신의 책임 하에 스스로 취하는 행위에 의해서만 고(苦)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분은 인류 역사상 부처님이 처음이셨다.


  아무리 해탈을 구걸하고 빌어 봐야 그 누구도 이를 성취시켜 줄 수는 없다. 타인이 우리들에게 도움의 손을 뻗친다 해야 기껏 이런저런 지시나 가르침을 주는 등의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최상의 자유는 오로지 자기 능력을 최대로 발현하여 진리에 눈뜸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을 뿐이며 인간이든, 신이든, 그 어떤 초월자에게 기도하고 간청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서도 각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짐스러운 일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려 들지 말고 연구, 분석을 통해 그 해결의 길을 스스로 찾음으로써 자기가 지닌 내면의 힘과 훌륭한 자질을 계발하는 계기로 삼도록 노력하라고 일깨워 주셨다.


연기(緣起)


깨달은 직후 일주일 간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 앉으셔서 해탈의 무상법열(無上法悅)을 누리고 계셨다. 이레가 되던 날 초저녁 부처님은 삼매(Samādhi)에서 나와 연기(緣起)에 관해 순서대로 관하셨다.[順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즉 무지[無明]가 있음을 연(緣)으로 하여 의지에 의한 형성작용 또는 업지음[行]이 있고, 이 의지의 형성작용이 있음을 연(緣)으로 하여서 (재생) 식(識)이 있고, 식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명색(名色:심신의 결합)이 있고, 명색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22)이 있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접촉[觸]이 있고, 접촉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느낌[受]이 있고, 느낌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갈애[愛]가 있고, 갈애가 있음을 연으로 하여 집착[取]이 있고, 집착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생성과정[有]이 있다. 생성과정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늙음[老], 죽음[死], 슬픔[愁], 비탄[悲], 괴로움[苦], 근심[憂], 절망[惱]이 있게 된다. 이처럼 해서 이 모든 고의 무더기[苦蘊]가 생겨난다.”


그날 한밤중[中夜]에 부처님은 역(逆)으로 연기를 관하셨다.[逆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무지가 완전히 멸하면 의지의 형성작용이 멸하고, 의지의 형성작용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멸하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멸하면 접촉이 멸하고, 접촉이 멸하면 느낌이 멸하고, 느낌이 멸하면 갈애가 멸하고, 갈애가 멸하면 집착이 멸하고, 집착이 멸하면 생성과정이 멸하고, 생성과정이 멸하면 태어남이 멸하고, 태어남이 멸하면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괴로움, 근심, 절망이 멸하게 된다. 이리하여 이 모든 고의 무더기가 멸하게 된다.”


그날 새벽녘에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순(順)으로 또 역(逆)으로 관하셨다.[順逆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즉 무지가 있음을 연(緣)으로 하여 의지의 형성작용이 있고, 이 의지의 형성작용이 있음을 연(緣)으로 하여서 식(識)이 있고, 식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이 있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접촉[觸]이 있고, 접촉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느낌[受]이 있고, 느낌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갈애[愛]가 있고, 갈애가 있음을 연으로 하여 집착[取]이 있고, 집착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생성과정[有]이 있다. 생성과정을 연으로 하여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이 있음을 연으로 하여 늙음[老], 죽음[死], 슬픔[愁], 비탄[悲], 괴로움[苦], 근심[憂], 절망[惱]이 있게 된다.


이리하여 이 모든 고의 무더기가 생겨난다. 무지가 완전히 멸하면 의지의 형성작용이 멸하고, 의지의 형성작용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멸하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멸하면 접촉이 멸하고, 접촉이 멸하면 느낌이 멸하고, 느낌이 멸하면 갈애가 멸하고, 갈애가 멸하면 집착이 멸하고, 집착이 멸하면 생성과정이 멸하고, 생성과정이 멸하면 태어남이 멸하고, 태어남이 멸하면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괴로움, 근심, 절망이 멸하게 된다. 이리하여 이 모든 고의 무더기가 멸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근처에서 자리를 여섯 번 옮기며 여섯 주일을 홀로 머무셨다. 여섯 주일이 끝날 무렵, 따빠수와 발리까라는 두 상인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떡과 꿀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부처님과 법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제자로 거두어 주십시오.”

이리하여 그들은 첫 재가신도(upāsaka)가 되었다.


법의 바퀴를 굴리시다[初轉法輪]


세존께서 보리수 근처에 홀로 계실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깨달은 이 법(法 Dhamma)은 심오하여 알아차리기도 이해하기도 힘들며,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만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여 그 즐거움에만 탐닉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진리, 즉 연기법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우리라. 또한 모든 조건 지어진 것[行]의 정지(靜止), 일체의 생성요인(upadhi)의 방기(放棄), 갈애의 소진, 탐욕을 멀리함[離慾 virāga], 멸진(滅盡 nirodha), 열반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우리라. 설혹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번거롭고 피곤할 것인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자 부처님께서는 법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불안(佛眼)27)으로 세계를 둘러보니, 사람들 가운데에는 눈이 엷게 가려진 사람도 두텁게 가려진 사람도 있고, 근기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있고, 선량한 자질을 가진 사람, 나쁜 자질을 가진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어려운 사람, 현재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위험에 당면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두루 섞여 있는 것이 여실하게 보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장중한 말씀으로 법을 기꺼이 설하실 뜻을 천명하셨다.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도다. 귀 있는 자들은 기대할지니라. ;

Apārutā tesaṁ amatassa dvārā Ye sotavanto pamuñcantu saddhaṁ”


누구부터 법을 가르칠까 생각해 보니, 옛날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뿌따가 생각났다. 그들이 현명하고 식견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안으로 살펴보니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전에 동료였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기로 마음을 정하셨다. 그들은 아직도 소득없는 극단적인 고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이 베나레스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녹야원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아시고 세존께서는 베나레스까지 약 150마일의 도보 여행을 시작하셨다. 가야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노상에서 우빠까라는 수행자와 마주쳤는데, 그 사람은 세존의 거룩하신 모습에 감동한 나머지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어느 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까?”

그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나에겐 스승이 없고,

지상에도 천상에도 나와 동등한 존재도 없도다.

나는 비길 데 없는 스승이며, 아라한이며,

나 혼자만이 가장 높이 깨달았도다.

모든 번뇌를 끄고

열반의 고요를 이루었도다.

나는 법의 바퀴[法輪]를 굴리러

까아시의 도성(베나레스)으로 가노라.

무지가 군림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나는

불사(不死)의 북을 울릴 것이니라.


“벗이여! 당신은 일체의 승리자라는 말이군요.”하고 우빠까는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번뇌의 멸진을 이룬 사람들, 실로 그들이야말로 바로 나와 같은 승리자이노라. 일체의 악을 나는 정복했노라. 그래서 나는 승리자로다.”


우빠까는 머리를 흔들고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그러고는 딴 길로 떠나가 버렸다.


부처님은 길을 따라 여행을 계속하시어 마침내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도착하셨다.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멀리서 본 다섯 고행자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벗들이여! 저기 고행자 고따마가 오고 있소. 그는 고행을 포기하고 호사스런 생활로 되돌아간 사람이오. 그가 오면 아무런 인사도 하지 맙시다.”


그러나 부처님이 가까이 다가가시자 그들은 부처님의 위엄에 눌리어 자신들의 애당초 생각을 지킬 수 없었다. 한 사람은 마중 나가 발우와 가사를 받아 들었고, 다른 사람은 자리를 준비하고, 또 다른 사람은 씻을 물을 가져다 드렸다. 마련해 드린 자리에 부처님께서 앉으시자, 다섯 고행자들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전처럼 동등한 입장에서 ‘벗이여(āvuso)!’ 하고 인사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여래(如來)를 벗이라는 말로 불러서는 안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여래는 (해야 할 일을) 해 마친 사람[應供:아라한]이며, 위없는 높은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無上正等覺者]이니라.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불사(不死)는 성취되었도다. 나 이제 그대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그대들에게 법을 설해 주겠노라. 나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대들은 바로 이 생에서 그대들 스스로의 힘으로 출가수행의 목적인 무상(無上)의 청정을 깨닫고 실현하게 될 것이니라.”


그러자 다섯 사문은 “벗, 고따마여! 당신은 이전에 그처럼 금욕과 고행, 그리고 자기학대를 격렬하게 할 때도 초인적 눈과 지혜를 얻지 못했소. 이제 고행을 포기하고 사치와 방종에 빠진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초인의 눈과 지혜를 얻었다는 말이오.” 하고 반문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여래는 정진을 그만 두고 사치와 풍요의 생활로 돌아선 적이 없노라. 여래는 해 마친 사람이며 지고한 각자이니라. 잘 들으라, 비구들이여. 불사(不死)는 성취되었노라. 내가 그대들을 가르치겠노라. 법을 그대들에게 설해 주겠노라.”


두 번째도, 비구들은 부처님께 똑같은 말을 하였고, 부처님도 똑같은 대답을 하셨다. 세 번째도 비구들은 똑같은 반문을 하였다. 부처님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태도를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일찍이 내가 그대들에게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지 말해보라.”

이와 같이 간절하신 부처님 말씀에 감복한 다섯 고행자들은 비로소 승복하게 되었다.

“아닙니다.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상의 현자, 자신을 조어(調御)하신 분께서는 참을성과 친절로, 지혜와 방편으로 다섯 고행자의 마음을 조복시켰다. 부처님의 말씀에 감복하고 확신을 갖게 된 사문들은 드디어 가르침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게 된 것이다.


중도(中道)


그 날, 서기전 528년 7월 보름날 저녁, 해가 지면서 때 맞춰 달이 막 떠오르고 있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부처님은 그들에게 법을 설하기 시작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극단은 출가자들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일이니 이는 저열하고, 천박하며, 세속적이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익됨이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고행이니 이는 고통스럽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익됨도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들 극단을 피해서 중도를 깨달았느니 이는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가져오며 적정과 신통지,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끈다. 비구들이여!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八支聖道]이다. 정견(正見 : 바른 견해)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정어(正語 : 바른 말)

정업(正業 : 바른 행위)

정명(正命 : 바른 생활수단)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념(正念 : 바른 마음챙김)

정정(正定 : 바른 정)이다.”


다시 부처님은 그들에게 사성제(四聖諦)를 설하셨다. 고(苦), 고의 일어남[苦集], 고의 멸[苦滅], 고의 멸에 이르는 길[苦滅道]의 네 가지 성스런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30)


이렇게 지고하신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선포하심으로써 마침내 법의 바퀴(Dhamma-cakka)를 굴리기 시작하셨다. 이 첫 법문, 녹야원의 메시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땅 위를 걷는 모든 생물의 발자국이 코끼리의 훨씬 큰 발자국에 담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포괄된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각 항목을 설명하시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智 ñāṇa)가, 혜(慧 paññā)가, 명(明 vijjā)이, 광(光 āloka)이 나의 내면에 나타났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관한 나의 통찰지혜[知見 ñāṇadassana]가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것으로 밝혀지기 전에는 나는 결코 자신이 비할 바 없는 지고의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얻었다고 선언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런 진리에 관한 나의 지견이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것으로 분명해지자 그때 비로소 나는 비할 바 없는 지고의 깨달음을 얻었음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자 다시 나의 내면에 지견이 솟아났다. 즉 내 마음의 해탈[心解脫]이 확고부동하며(akuppā me ceto vimutti), 금생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더 이상의 몸받음[再生]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31)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다섯 비구는 환희에 차서 세존의 말씀을 찬탄했다.


신사빠 숲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얼마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가는 녹야원에서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신사빠 숲의 말씀에서 다시 확인된다.


한 때 세존께서는 꼬삼비(알라하바드 근처)의 신사빠 나무숲에서 머무셨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신사빠 나뭇잎들을 손에 들고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에 있는 신사빠 잎사귀와 저 숲에 있는 잎들 중, 어느 쪽이 더 많은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손에 드신 잎사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저편 숲에 있는 잎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 비구들이여, 내가 완전히 깨닫고서도 너희들에게 설하지 않은 것은 많다. 내가 너희들에게 설한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비구들이여! 왜 내가 그 모두를 설하지 않는가? 그것들은 유익하지도 않고 청정한 삶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싫은 마음을 일으킴[厭離 nibbidā], 탐욕을 멀리 함[離慾], 멸진[滅盡], 적정[寂靜], 완전한 지적능력[神通智 abhiññā), 완전한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그것들을 설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멸진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왜 이러한 진리를 설하는가?

이 진리들은 실로 유익하고 청정한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들은 싫은 마음을 일으킴, 탐욕을 멀리 함, 멸진, 적정, 완전한 지적능력, 완전한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어 준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이 진리들을 설하는 이유이다. 비구들이여! 따라서, 이것이 괴로움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멸진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멸진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느니라.”


부처님은 역설하신다.

“나는 오직 한 가지를 알려 줄 따름이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멸진이노라.(dukkhamceva paññāpemi, dukkhassaca nirodham)”


이렇듯 명쾌하게 일러주신 말씀을 올바로만 이해한다면 불교를 다 이해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이 한 가지 원리의 적용일 뿐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부처님이든 발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사성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성제야말로 어떤 시대의 부처님일지라도 한결같이 가르치실 전형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명의(名醫) 중의 명의


우리는 부처님을 또한 가장 뛰어난 명의(名醫), 최고의 의왕(醫王)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분은 실로 필적할 이 없는 치유자이시다.


무엇보다도 부처님이 네 가지 진리를 설하시는 방법부터가 의사가 취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의사로써 그 분은 먼저 병을 진단하고, 그 병의 원인과 발생 과정을 찾아낸 다음 병의 제거 방법을 검토한 후 처방을 내렸다.


고(苦 dukkha)는 병이다[苦]. 갈애가 병의 발생원인 또는 근본 원인이다[集]. 갈애를 없앰으로써 병이 제거된다. 그것이 치유이다[滅]. 여덟 가지 성스런 길은 그 처방이다[道].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스승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이라고 불리십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부처님이 해주신 대답은 명확했다. 바로 네 가지 진리에 대해 완전한 지혜를 갖췄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대답은 이러하다.

“나는 알아야 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노라.”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선포하시어, 법륜이 구르기 시작하였고, 또 다섯 고행자가 귀의한 곳이기 때문에 교법[法]과 승단[僧]의 탄생지가 되었다.35)


법의 전파


그 해 부처님은 우기(雨期)를 녹야원에서 보내셨다. 이 석달 동안 부유한 집안 출신의 젊은이인 야사를 필두로 새로이 50여명의 젊은이들이 승단에 들어왔다. 이제 부처님은 60여명의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아라한으로서 법을 깨닫고 충분히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분들이었다. 우기가 끝나자, 부처님은 이들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든 결박에서 해방되었도다. 그대들도 역시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든 결박으로부터 벗어났도다. 비구들이여! 이제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안녕, 행복을 위해 두루 다니라.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같이 가지 말라. 그래서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한 이 법을,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이 법을 선포하라. 청정한 삶을, 완전하고 순결한 이 성스런 삶을 선포하라. 세상에는 눈이 과히 흐리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법을 듣지 못하면 그런 사람들마저 바른 길에 들 기회를 놓치게 되고 말 것이다. 세상에는 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루웰라로, 세나니가마로 가서 법을 가르치겠노라.”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입멸하시는 날까지 계속하게 되는 성스런 전법활동을 시작하셨다. 제자들과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인도의 크고 작은 길을 두루 편력하시며 무한한 자비와 지혜의 광명으로 그 모든 길을 가득히 채우셨다. 처음 승단은 겨우 60여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수천으로 늘어났다. 비구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많은 사원이 지어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날란다, 위끄라마실라, 자갓달라, 위끄라마뿌리, 그리고 오단따뿌리 등과 같은 인도의 사원대학들이 나타나 일대 문화 중심지를 형성, 그 영향력은 전 아시아 대륙에 미쳤고 나아가 전 인류의 정신생활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45년 간 성공적으로 교화사업을 펴신 후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유훈(이 책의 106쪽 참조)을 남기신 다음 꾸시나라38)의 말라 족들의 살라나무 숲39)에서 80세를 일기(一期)로 입적하셨다.


부처님의 교화사업


45년이라는 긴 교화기간 동안, 부처님은 인도의 북부지방을 널리 편력하셨다. 그러나 우기(雨期)의 안거철에는 대개 한 곳에 머무셨다.


다음은 부처님이 안거하신 지역들을 경전에서 간추린 것이다.

첫해 : 바라나시(베나레스) - 7월 보름에 처음으로 법을 선포하신 후 부처님은 첫 우기를 이시빠따나에서 보내심.


2, 3, 4년째 : 라자가하[王舍城]의 웰루와나[竹林精舍] - 유명한 재가 후원자 수다따 장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이 3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는 자선가로 유명해 아나타삔디까 즉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돌봐 주는 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꼬살라국의 사와티[舍衛城] 사람인 그는 마가다국의 라자가하에 왔다가 부처님이 출현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친견하고 법문을 들었다. 삼보에 깊은 신심을 발하게 된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예류과40)를 성취했다. 그 후 그는 부처님의 주요 후원자로 유명해졌다. 오늘날 사헤트-마헤트로 불리는 사와티에 그 유명한 제따와나 사원[祇園精舍]41)를 지어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바쳤다. 이 사원의 유적지는 지금도 볼 수 있다.


5년째 : 웨살리 - 부처님은 중각강당(重閣講堂)에서 지내셨다. 숫도다나 왕이 이 해에 병이 들었다. 부처님은 부왕(父王)을 찾아가 법을 설해 드렸다. 법문을 들은 왕은 완전한 청정(아라한과)을 얻게 되었고, 일주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누린 후 입적했다. 비구니 승단이 생긴 것도 이 해였다.(이 책의 비구니 승단 장(章), 79쪽을 참조.)


6년째 : 만꿀라 언덕 - 여기에서 부처님은 쌍신변(雙身變)42)을 나투셨다. 친족인 석가족의 아만심을 꺾기 위해서 까삘라와투에서 이러한 신통을 처음으로 보여주신 적이 있다.


7년째 : 삼십삼천 - 이 해에 부처님은 삼십삼천에 올라가 마야 부인을 필두로 한 천신들에게 수승한 법인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마야 부인은 싯닷타 왕자를 낳고 이레만에 죽어서 삼십삼천에 남자천신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8년째 : 베사깔라 숲 - 부처님이 여기 계실 때 금슬 좋은 나꿀루삐따 부부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그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다음 생에도 이어지기를 발원했다. 부처님은 이 두 사람을 제자들 중 가장 의좋은 사이로 인정하셨다.


9년째 : 꼬삼비의 고시따 정사


10년째 : 빠아릴레이야까 숲 - 꼬삼비에서 한 비구가 저지른 사소한 잘못을 놓고 비구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 해의 일이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훈계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였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이 숲으로 물러나셨다. 안거가 끝날 무렵 분쟁은 해결되어 비구들은 사와티 성으로 와서 부처님께 용서를 빌었다.


11년째 : 에까날라 마을(마가다 국) - 『숫따니빠따』에 나오는 유명한 「밭을 가는 바라드와자 경」을 설하신 곳이 바로 여기다. 농사짓는 바라문 바라드와자가 부처님께 무례하게 말을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특유의 침착성으로 이를 응대하여 결국 그 바라문을 열렬한 신도로 만드셨다.


12년째 : 웨란자 마을 - 부처님께서 율(律)을 제정하기 시작하신 것이 이 해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웨란자의 사건이 생긴 것도 이 안거기간 중이었다. 그는 부처님을 친견하고 불교 수행에 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한 다음 부처님의 대답에 만족하여 불자가 되었다. 그는 부처님과 승단이 그 해 안거를 웨란자 마을에서 보내도록 청했다. 마침 그 해에 기근이 들었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말장수들이 올리는 매우 조악한 음식(말들이 먹는 보리)으로 그 철을 지내야 했다. 비록 브라만이 약속은 저버렸으나 부처님은 당신이 늘 행하시는 관례대로 안거를 마치고 행각을 떠나기 앞서 초청자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바라문 웨란자는 자신이 부처님과 제자를 청해 놓고도 가사에 골몰한 나머지 한철 내내 초청자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허물을 사과한 후 다음날 부처님과 승단에 음식과 옷을 보시했다.


13년째 : 짤리야 바위산(짤리까 시 부근) - 이 철에는 메기야 장로가 부처님의 시봉을 들었다. 장로는 강가의 아름다운 망고 숲에 마음이 끌려 그곳에 가서 선정을 닦고 싶다고 부처님께 허락을 구했다. 다른 비구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부처님이 만류하셨건만 그는 거듭 졸랐다. 마침내 부처님의 허락을 받고 그곳에 갔지만 장로는 뜻밖에도 선정은커녕 감각적 쾌락, 악의, 해악심 따위에 시달리기만 하다가 실망해서 돌아왔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메기야여!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 성숙하는 데는 다음의 다섯 가지가 도움이 된다. 첫째 좋은 벗(선지식), 둘째 기본적 계율에 따른 덕 있는 행위, 셋째 탐욕을 멀리함, 고요․멸진․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훌륭한 조언, 넷째 나쁜 생각들을 버리고 건전한 생각들을 지니려는 노력, 다섯째 사물의 발생과 소멸을 분명히 보는 지혜의 획득이 바로 그것이다.”(이 예비 수행은 보다 높은 단계의 선정을 익히기 위해 반드시 닦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14년째 : 사와티의 제따와나 정사 - 이 철에, 이제껏 사미였던 라훌라 존자가 구족계(비구계)를 받았다. 율장에 따르면 구족계는 20세가 되어야만 받을 수 있는데 라훌라 존자가 그 나이가 된 것이다.


15년째 : 까삘라와투 - 싯닷타 왕자의 탄생지. 이 해에 야소다라 비의 아버지 수빠붓다 왕이 죽었다.


16년째 : 알라위 시(市)-이 해에 부처님은 사람 잡아먹기를 즐기는 야차 알라와까를 제도하여 추종자로 만드셨다. 알라와까와의 문답은 『숫따니빠따󰡕의 「알라와까 경」에 자세히 나온다.


17년째 : 라자가하의 웰루와나 정사 - 이 철에 유명한 고급 창녀이며, 의사 지와까의 누이동생인 시리마가 죽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신 부처님은 왕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그 시체를 사갈 사람을 찾는 공고를 내어 보라’고 하셨다. 살아있을 때 그토록 사람들을 매혹시키던 그 몸뚱이. 그러나 누구 하나, 돈은커녕 거저 주어도 그 시신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이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대중들을 향해 읊으셨다.


“보라, 이 분칠 한 모습을

상처 투성이의 (뼈마디로) 엮어 이루어진

병든, 뭇사람들의 관심의 적이던

이 몸을, 거기 어디에 항상함이 있고

견고함이 있는가.”


18년째 : 짤리야 바위산 - 이 철에 한 직조공의 어린 딸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죽음을 염(念)하는 공부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 가르침을 잊지 않고 부지런히 닦았던 소녀는 다음에 다시 친견했을 때 부처님이 던지신 네 가지 질문에 정확히 대답했다. 소녀의 대답은 매우 철학적이어서 부처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처님은 소녀를 칭찬하면서 대중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이 세상은 눈멀었도다. 분명히 보는 자 적도다.

겨우 몇몇 사람만이 좋은 세계(천상계)로 가는구나.

그물을 벗어난 새처럼.”


소녀는 법을 듣고 성위(聖位)의 첫단계(예류과)를 성취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녀는 요절하고 만다.


19년째 : 짤리야 바위산


20년째 : 라자가하 - 웰루와나 정사


21년부터 43년까지 : 사와티에서 이 스물네 번의 안거 중 열여덟 안거는 기원정사에서, 나머지 안거는 동원정사(東園精舍, 鹿子母講堂)에서 지내셨다. 이 기간 동안은 아나타삔디까와 위사카가 주된 시주였다.


44년째 : 벨루와 마을(웨살리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추정됨) - 이곳에서 부처님은 크게 앓으셨으나 의지력으로 이겨내셨다.


성도 후 45년째, 부처님은 우기가 시작되기 전인 5월에 꾸시나라(혹은 꾸시나가라)에서 반열반에 드셨다.

 

정각을 이루신 후 처음 20년 간은 다음의 스님들이 수시로 스승을 시봉했다. 비구 나가사말라, 나기따, 우빠와나, 수낙카따, 사가따, 라다 그리고 메기야와 사미 쭌다였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후 부처님께서는 일정한 시자를 정하기를 원하셨다. 그러자 사리뿌따, 마하 목갈라나 등 80여 명의 대 아라한들이 기꺼이 모두 스승을 시봉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아라한들이 당신을 시봉하기보다는 인류에게 직접 보다 큰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러자 장로들은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던 아난다 장로에게 시자로 받아주실 것을 청해 보라고 권유했다. 아난다 장로의 대답이 흥미롭다.


“스승님께서 나를 시자로 삼기를 원하신다면 직접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다른 사람들의 권유를 기다리지 말라. 너 혼자서 나를 시봉하도록 하여라.”


  부처님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


완전한 깨달음,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발견과 실현은 결코 신의 섭리에 의해 선택된 어떤 특정인의 특권도 아니고, 인류사에 되풀이될 수 없는 일회성의 일도 아니다. 완벽한 청정과 지혜를 구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또 성불의 필수요건인 십바라밀과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불퇴전의 의지로 닦아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득한 먼 옛날에도 여러 부처님들이 계셨고, 또 미래에도 필요성이 있고 조건이 성숙되면 부처님들이 나타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먼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들의 이 시대에도 ‘불사(不死)에의 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다. 그 문에 들어서기만 하면 누구나 완전한 청정(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서 괴로움으로부터의 궁극적인 해탈(즉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번뇌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었다는 점에서 이 사람들은 당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선언하셨다.


“번뇌의 소멸을 얻는 사람들, 그들은 실로 나와 같은 승리자들이로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또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와 여느 아라한들과의 차이점도 분명히 밝히셨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아라한이면서 대각자이노라. 여래는 일찍이 알려진 적이 없는 길을 선포한 사람이도다. 실로 그는 길을 아는 사람이고, 길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길에 숙달한 사람이도다. 이에 반해 여래의 제자들은 여래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는 사람들이노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 차이로다. 아라한이면서 대각을 성취한 여래와 통찰에 의해 자유를 얻은 제자들과의 차이점이노라.”


 정법의 특징


비밀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그릇된 교의임을 드러내는 표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부처님은 비밀교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장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나는 법을 가르침에 있어 드러난 교리와 비밀스런 교리를 각각 따로 세우지 않았다. 아난다여! 여래는 드러난 교의와 비밀스런 교의를 구별짓지 않고 법을 설해왔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난다여, 여래에게는 주요한 지식을 제자들에게 감추는 ‘주먹 쥔 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우주를 다 감싸는 무한대의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신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윤회라는 끝없는 헤맴의 족쇄에서 풀려나는 데 필요한 지식이라면 그 무엇 하나 감추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설해 주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눈 있어 볼 수 있고 마음 있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열려 있다. 또 불교는 어떤 사람에게도 총검이나 대포를 들이대고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강요에 의한 개종은 불교도들 사이에서는 알려진 적도 없으며,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모순된다.


필딩 홀(H. Fielding Hall)은 그의 저서 『어느 한 무리의 넋󰡕에서 부처님의 자비정신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불교전쟁이란 있을 수 없다. 일찍이 그 어느 나라도 불교도들이 무력으로 약탈한 적은 없으며, 붓다의 이름으로 단란한 가정을 피로 물들인 적도 없으며, 한에 사무친 여인네들이 붓다의 이름을 입에 올려 저주한 적도 없었다. 이렇듯 붓다와 그 분의 가르침은 피의 얼룩으로 더렵혀진 적이 없다. 붓다야말로 사랑으로 이루어진 평화, 베풂으로 이루어진 평화, 연민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평화를 가르치신 분이며,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을 잘못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기독교 성직자 조셉 웨인(Joseph Wain)은 평한다. ‘불교는 통제가 아니라 원칙에 의한 생활, 우아한 생활을 가르치며, 그 당연한 귀결로 불교는 관용의 종교다. 태양 아래 가장 자비로운 종교체제가 불교이다. 교법의 전파과정 그 어디에서도 피를 본 적이 없는 종교이다. 신앙이 다르다고 해서 남을 박해하거나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이는 기독교가 아직까지도 배워야만 할 교훈이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오늘을 아름답게 만들고 현 순간을 성화(聖化)시키도록 가르쳤다.’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부처님은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특별히 선택된 애제자란 없었다. 제자들 가운데서 아라한과를 성취했던 제자들은 모두 청정을 완성하여 애욕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존재에로 옭아매는 족쇄들을 풀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각각 특수한 지식과 수행에 뛰어나고 또 타고난 성품에도 차이가 있어 남다른 위치를 차지하게 된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스승은 그들이라 하여 특별한 총애를 주지는 않았다. 예컨대 우빨리는 낮은 카스트의 이발사 집안 출신이었지만 바라문이나 크샤트리아 계급에 속했던 수많은 아라한들을 제치고 계율에 관해 으뜸가는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사리뿌따와 마하 목갈라나는 바라문 계급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장구한 전생동안 세워온 원력 때문에 부처님의 상수(上首)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사리뿌따는 지혜에 뛰어나고, 마하 목갈라나는 신통에 뛰어났다.


부처님은 제자들이 당신이나, 당신의 가르침에 맹목적이고 굴종적인 믿음을 바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 분은 항상 지성적 탐구와 면밀한 고찰을 강조하셨다. 자유사상의 최초의 헌장이라고 일컬어 마땅할 어느 경전에서, 부처님은 깔라마인들의 질문에 답하는 가운데, 단호하게 비판적 탐구자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계시다.


“그렇소,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대들은 세평이나 구전(口傳), 풍문에 이끌려서도 안 되며, 또 종교의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아니면 단순히 논리나 유추만으로, 또는 외양만을 취하여 또는 어떤 이론에 미루어 볼 때 타당하다고 해서, 또는 그럴싸한 가능성 때문에, 또는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 하는 생각 때문에 끌려가서는 아니 됩니다. 깔라마인들이여! 당신들 스스로 생각해서 이런 것들은 건전하지 못하고, 이런 것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며 이롭지도 못하다고 알았을 때, 그때는 당연히 그러한 것들을 거부하도록 하시오. (……)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서 ‘이런 것들은 건전하고, 나무랄 데 없고 이롭다’고 알았을 때는 그것을 받아들여 거기에 머물도록 하시오.”

그런 연후 부처님은 물으셨다.

“자,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여기 어떤 사람에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이런 것들은 그 사람에게 이득이 되겠소, 손실이 되겠소. 탓할 일이겠소, 탓하지 않아야 할 일이겠소?”

“존사(尊師)시여! 그런 것들은 그에게 손실이 되며, 그런 것들은 탓할 일입니다.”

“자, 깔라마인들이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어떤 사람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칩시다. 이것은 그에게 이득이겠소, 손실이겠소, 탓할 일이겠소, 아니겠소?”

“존사시여! 그에게 이로움이 되고 탓할 점이 없습니다.”

“그렇소, 깔라마인들이여! 방금 내가 그대들에게, ‘그대들은 세평이나 구전, 풍문에 이끌려서도 안 되며, (……) 건전하고, 나무랄 데 없고, 이롭다고 알았을 때는 받아들여 거기에 머물도록 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하려 함이오.”


순전히 믿음 때문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불교의 정신과 어긋난다. 그래서 부처님과 제자들 간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있다.

“(나의 가르침을) 알고 이를 따르면서 그대들이 ‘우리는 스승을 기리고 존경하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을 받든다’고 말할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찾아낸 사실만을 말하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항상 사실을 직시하였으며 진리와 부합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인정하거나 양보하지 않으셨다. 또 그 분은 우리 역시 어떤 것을 정당한 이유 없이 무분별하게 진실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이해하는 것, 그리고 필요한 노력을 기울여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해탈을 스스로 이룩해 내는 것이다.


“그대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래는 다만 길을 일러줄 따름이다.”

 

“그대 스스로가 자신의 섬이 되라, 그대 스스로가 자신의 피난처가 되라. 남을 피난처로 의지하지 마라. 법을 섬으로 삼고, 굳건히 붙들어라. 법을 피난처로 삼고, 굳건히 붙들어라. 그 밖에 다른 어떤 피난처에도 의지하려 들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처님이야말로, 사상 최초로 인류에게 해탈은 스스로 찾아야지 그 어떤 구원자에게, 그것이 인간이든 또는 신이든 간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분이시다.


남이 우리를 낮은 단계의 삶에서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 주고 또, 궁극적으로 해방시켜 준다는 관념은 우리를 게으르고 나약하며, 무기력하고, 어리석게 만들기 쉽다. 이런 종류의 신앙은 품위를 떨어뜨리고, 도덕적 존재로서 인간이 발할 수 있는 위엄을 여지없이 짓눌러 버린다.


깨달으신 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립심을 기르도록 권하셨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간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고(苦)로부터의 해방은 각자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갈고 닦음으로써 나름대로 이루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참된 청정


불교사상에 있어서는 신앙심이나 외경심 같은 것은 사물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법의 진리성은 오로지 통찰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며, 그 어떤 존재 - 그 정체를 우리가 알건 모르건 간에 - 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이나 외경심을 갖는다고 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은 맹목적으로 전지전능한 신을 믿거나 외경하는 것을 진리를 이해하는 접근방식으로서 찬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소득없는 의례․의식에 집착하는 것도 반대하셨다. 단식이라든가, 성수에 목욕한다든가, 동물을 희생으로 바친다든가, 그 밖에 이와 유사한 행위들은 겉으로 씻어내는 행위에 불과할 뿐, 참다운 의미에서 인간을 정화시키거나 성스럽고 고귀하게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바라문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은 적이 있다. 그때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해탈을 구하려면 어떻게 스스로를 닦아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신 후, 이에 덧붙여 마음의 때가 사라지고, 청정한 삶을 완성하고, 할 일을 해 마친 사람은 안으로 목욕하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하셨다.


마침 부처님 가까이에 앉아 있던 바라드와자가 이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고따마께서는 바후까 강에 목욕하러 가십니까?”

“브라만이여! 바후까 강에는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고따마시여! 바후까 강은 많은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악업을 바후까 강에서 씻어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강에서 목욕한다고 해서 마음의 때나 죄가 씻어질 수는 없다는 점을 납득시킨 다음 이렇게 가르치셨다.

“브라만이여! 이 법과 계율에서 목욕하면 어떤 존재든 안락함을 얻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는다면, 또 그대가 확신에 차있고 옹졸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가야 강에 가야 한단 말인가. 그대 집에 있는 우물물 또한 가야의 물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법구경』 165 게송은 가르쳐 준다.

 

 “악을 행하는 것도 자신이요,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도 자신이며,

악을 범하지 않는 것도 자신이요,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것도 자신이다.

청정과 더러움이 오로지 자신에게 달렸다.

아무도 남을 청정하게 해줄 수는 없다.”

 

카스트 문제


카스트 체제는 당시 인도의 바라문 계급들에게는 사활이 달린 중대 관심사였으나 부처님은 이 제도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철저히 반대 입장을 취하셨다. 따라서 이 제도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셨다. 승단에서는 모든 카스트가 화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이는 마치 여러 강물이 바다에 들면 하나가 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출가 전의 이름도, 카스트도, 종족도, 모두 버리고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따름이니 그것이 승가(saṅgha)다.


부처님의 혈통을 묻는 바라문 순다리까 바라드와자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나는 바라문도, 왕자도, 농부도 그 밖에 무엇도 아니오. 세상의 모든 계층을 다 안다오. 그러나 알기에 나는 내 길을 자아를 멸한 사람으로서 가고 있다오. 집 없이, 누더기 걸친 채

머리를 깎고, 나는 홀로 내 길을 걷소, 조용히. 나의 출신을 묻는 것은 부질없을 뿐.”


또 한 번은 카스트를 믿고 건방을 떠는 한 바라문이 “서라, 이 까까중아. 멈춰라. 이 천민(노예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이)아!” 하고 부처님을 모욕한 일이 있었다.

스승께서는 조금도 언짢은 기색 없이 점잖게 대답하셨다.

“출신 때문에 천민이 되는 것이 아니오. 출신 때문에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오. 행위가 사람을 천민으로도 만들고, 행위가 사람을 바라문으로도 만드는 것이오.”


그러고서는 정말 천민의 특징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마침내 오만하던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뉘우치어 부처님께 귀의했다.


부처님께서는 승단의 고귀한 삶을 실천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그 사람의 카스트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문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미천한 계급의 출신으로 후에 승단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부처님은 그때껏 카스트와 계급으로 사분오열 되어있던 사람들을 관용과 화합으로 서로 함께 어울리도록 노력하신 당대 유일한 스승이셨다.


승단의 계율에 관한 한 최고 권위자였던 우빨리는 원래 이발사였는데, 이 직업은 비천한 계급의 사람이 종사하는 가장 천한 직업의 하나였다. 후에 아라한이 된 수니따도 천한 직업인 청소부 출신이었고, 비구니 승단의 뿐나와 뿐니까는 노예출신이었다. 리스 데이비즈 부인에 의하면 공부를 이뤄 깨달음을 성취한 비구니의 8.5퍼센트가 글도 배우지 못한, 천대받던 카스트 출신이었다고 한다.64)


수제자들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는 부처님께서 대각을 이루신 후 맨 먼저 찾으셨던 지역 중의 하나이다. 출가 초기 수행시절에 부처님은 세니야 빔비사라 왕에게 대각을 성취하면 꼭 라자가하 성을 찾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을 뵙게 되자 크게 기뻐하여, 그 자리에서 가르침을 받은 다음 바로 재가신도가 되었다. 부처님을 열렬히 신봉하게 된 왕은 며칠 후에는 자신의 유희공원으로 쓰던 웰루와나 동산을 부처님께 바쳐 머무시도록 했다.


당시 라자가하는 새로운 사조의 중심지로서 많은 철학유파가 번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 산자야라는 사상가가 이끄는 학파가 있어 250명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우빠띠사와 꼴리따는 뒤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두 상수제자가 되었으니 사리뿌따와 마하 목갈라나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부처님을 만난 인연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우빠띠사는 한 사문의 엄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있는 거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과거 수많은 생을 통해 완성을 성취하고자 노력해 온 우빠띠사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제 바야흐로 결실을 맺을 순간에 이르렀음인지 이 날 따라 그 사문의 모습은 우빠띠사의 마음을 유달리 사로잡았다. 이 사문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아싸지였다. 우빠띠사는 이 고상한 사문이 누구의 제자이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라한이 탁발을 마칠 때까지 계속 따라갔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누가 당신을 출가하도록 설득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시며, 어떤 법(가르침)을 따르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아싸지 존자는 많은 말을 하기 꺼리는 듯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교의와 계율을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 대의만 간략히 말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우빠띠사의 대답이 주목할 만하다.

“좋습니다. 벗이여, 적든 많든 좋으실 대로 말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도 그 대의입니다. 장황한 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자 아라한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용하는 연기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게송을 한 수 읊었다.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것,

그에 관해 여래께서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것의 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 사문의 가르침이라네.”

 

우빠띠사는 이 게송을 듣자 바로 그 뜻을 이해했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yamkiñci samudaya dhammam sabbam tam nirodha dhammam)’임을 그 자리에서 깨닫고 깨침의 첫단계(예류과)를 성취했다.


  기쁨으로 가슴이 벅찬 그는, 서둘러 친구 꼴리따에게 달려가 아라한을 만난 사실과 가르침 받은 내용을 얘기해 주었다. 꼴리따 역시 친구가 전해 주는 게송을 듣고서 곧바로 깨침의 첫 단계를 얻었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스승 산자야에게 나아가 부처님을 따르자고 권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로서의 명망을 잃게 될까 두려워한 산자야는 제자들의 권유를 거절했다. 할 수 없이 꼴리따와 우빠띠사는 산자야의 강력한 만류를 무릅쓰고 그를 떠나 웰루와나 정사로 갔다. 부처님에게 귀의할 뜻을 사뢰자 부처님은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며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들이여! 법은 잘 설해져 있도다. 고귀한 삶을 통해 고를 완전히 없애버리도록 하라.”

그리고 그들을 승단에 받아들이셨다. 그들은 해탈을 성취한 후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승단을 이끄는 두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되었다.


부처님이 웰루와나 정사에 머무실 때 승단에 들어온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제자는 바라문 출신의 현자 마하 까사빠였다. 그는 구경해탈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 거대한 부(富)도 팽개치고 출가한 사람이었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자 그로부터 3개월 후, 왕사성 근처의 칠엽굴에서 아라한들의 대회동(1차결집)을 주관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아자따사뚜 왕의 후원을 받아 경과 율을 최초로 정리, 편찬한 그 모임은 불교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구니 승단


초기에는 승단이 남자들로만 구성되었었다. 이는 부처님께서 여자들이 승단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가여신도들 가운데는 세속을 벗어나 청정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신심깊은 여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싯닷타 태자의 양모였던 고따미 빠자빠띠를 설득하여 그를 앞세우고 부처님에게 나아가 여인들의 출가 수계를 허용해 주시도록 탄원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전히 이들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난다 존자가 나서서 부처님께 간청했다. 존자는 여인들의 열의에 감복하고 그리고 그들이 상심하는 모습에 동정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부처님께서 양보하셨으나 여인의 수계에 대해서는 8가지 제한조건을 더 첨부하셨다. 이렇게 하여 성불 후 5년째 되던 해에 비구니 승단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는 역사상 초유의 일로, 일찍이 여인들의 출가생활을 위해 단체가 만들어졌던 적은 없었다. 비구니 승단이 탄생되자 갖가지 인생행로를 걸어온 여인들이 속속 승단에 들어왔다. 비구니 승단의 지도자는 케마와 우빨라완나 두 장로니(長老尼)였다. 이들 고귀한 비구니들이 해탈을 향해 노력하는 정경과 마침내 해탈을 이루고서 읊조린 환희의 찬가들이『장로니게송집』에 생동감 넘치게 기록되어 있다.


까삘라와투에서


라자가하에 계시던 중, 부왕께서 꼭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전갈을 받은 세존은 까삘라와투로 향하셨다. 그러나 까삘라와투에 이르자 부처님은 곧바로 궁전으로 드시질 않고, 관례대로 도시 밖의 숲에 머무셨다. 다음 날 부처님께서는 발우를 들고 까삘라와투의 거리에 나아가 이 집 저 집 다니며 여법히 탁발을 하셨다. 숫도다나 왕은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부처님께 달려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십니까? 왜 음식을 구걸하러 다니십니까? 우리 가문에서 일찍이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왕이시여, 대왕과 대왕의 가족들이 대대로 왕의 후예이듯이 나는 옛 부처님들의 후예입니다. 옛 부처님들은 음식을 구걸하며 언제나 탁발생활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법을 설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깨어 있으십시오. 마음을 챙겨 지니십시오. 법다이 사십시오. 법답게 사는 사람들은 이생에서도, 내생에서도 행복하게 삽니다.”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듣자 왕은 확고하게 법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법을 이해한 것이다. 그런 연후 부처님께서는 궁전으로 향하셨다. 궁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처님께 경배 드리러 나왔으나 야소다라 비만 나타나지 않았다.

부처님은 몸소 그녀에게 갔고, 부처님을 뵙자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음을 깨닫고 부처님 발아래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전생담을 들려주시며 그 전생에 그녀의 공덕이 얼마나 위대했던가를 낱낱이 자세하게 밝혀주셨다. 이런 이야기를 듣자 그녀도 드디어 법을 이해하고 받들게 되었다. 후에 여성승단이 만들어지자 야소다라도 출가하여 최초의 비구니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부처님이 궁전에 계실 동안 야소다라 비는 아들 라훌라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세존에게 보내면서 일렀다.

“라훌라야! 저분이 네 아버지이시다. 가서 너의 상속물을 달라고 하렴.”

라훌라 왕자는 부처님께 다가가 그 앞에 서서 말했다.

“현자시여, 당신의 그늘은 즐겁습니다.”

부처님께서 공양을 마치고 궁전을 떠나자, 라훌라 왕자는 따라가며 말씀드렸다.

“저에게 상속물을 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 세존은 사리뿌따에게 일렀다.

“그래, 그럼 사리뿌따여, 이 아이를 승단에 넣도록 하시오.”

그러고서는 사리뿌따에게 수계하는 방식을 자세히 일러주셨다.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깎고, 황색 가사를 입힌다. 한쪽 어깨에 가사를 단정히 걸친 다음, 수계자는 스님들에게 예배한 후, 스님을 향하여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이 자세가 잘 안 되면 꿇어앉아도 된다.) 두 손을 올려 합장하고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법에 귀의합니다.

승단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두 번째, 법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 승단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세 번째, 법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 승단에 귀의합니다.

 

5부경 중 하나인 『중부󰡕에는 ‘라훌라에게 주는 말씀’이란 제목의 경이 세 개나 실려 있다.(61, 62, 147경) 어린 라훌라에게 법을 가르치고 있는 이 경들은 한결같이 계율과 선정을 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 「마하 라훌라와다경」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라훌라야! 자애[慈]를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자애로운 마음을 닦으면 나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더불어 아파함[悲]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불어 아파하는 마음을 닦으면 잔인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더불어 기뻐함[喜]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을 닦으면 혐오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평온함[捨]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평온한 마음을 닦으면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육신의) 더러움[不淨]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러움을 관하는 공부를 닦으면 애욕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무상의 개념[無常想 aniccasaññā]71)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무상의 개념을 관하는 공부를 닦으면 아만(‘내가 있다’, ‘나다’라는 생각 asmi-māna)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출입식(出入息)을 염하는 공부(ānapāna sati)를 닦아라. 라훌라야! 출입식을 염하는 공부를 닦아 자주 익히면 얻는 바가 많아서 크게 이익되리라.”


 불전에 나오는 여인들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서는 바라문교의 영향 때문에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별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때로는 남성의 예속물로서 천시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당시 여성들 중에도 철학적 문제와 같은 지적 분야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는 예가 더러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여성들의 지위가 현저히 상승된 것은 역시 부처님의 덕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당신의 너그러운 마음과 큰 도량으로 언제나 여성들을 자상하고 정중하게 대하셨으며 그들에게도 똑같이 청정 그리고 성스러움에 이르는 고귀한 길을 가르쳐 주셨다.


세존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는 집안에 계신 친구요, 아내는 남편에게 최상의 벗이다.”


암바빨리는 평판이 좋지 못한 여자였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여인의 공양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여인이 올리는 음식을 다 드신 다음, 보답으로 법의 선물(법공양)을 주셨다. 그 가르침을 받고 깊이 신심을 일으킨 여인은 지금까지의 불성실했던 세속 생활을 청산하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그리고 매우 열심히 정진한 끝에 드디어 성자의 경지에 이르렀다.


부처님이 그 크신 자비심으로 여인들을 도와주신 예로서 끼사고따미의 얘기를 빠뜨릴 수는 없다. 불교의 지혜와 자비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준 감명깊은 일화이기 때문이다.


사와티 태생인 끼사고따미는 고따마족이었고 따라서 부처님과는 친척이 되는 셈이다. 너무나 몸이 야위고 연약해서 사람들이 끼사(말라깽이)고따미라고 불렀다. 여인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과 결혼해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아기는 걸음마도 하기 전에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버렸다. 아기의 죽음은 어머니에게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을 안겨주었다. 오직 하나뿐인 외아들을 향한 한없는 모정 때문에 어머니는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슬픔에 가슴이 메어져 정신이 나간 여인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기를 살려낼 약을 구하러 미친 듯이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그러나 사와티 성의 어떤 의사도 죽은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헤매던 끝에 마침내 부처님 앞에까지 이르게 된 여인은 죽은 아기를 세존의 발아래 내려놓으면서 자기 아들의 생명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대비주(大悲主)께서는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누이여! 좋은 영약이 있느니라. 내가 그대의 고통을 치유해 줄 테니 가서 겨자씨를 얻어 오너라. 그러나 고따미여! 겨자씨를 얻을 때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에서 얻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라.”

그러자 고따미는 곧 마을로 쫓아가서 겨자씨를 구하기 위해 집집마다 찾아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동정심에서 모두 겨자씨를 주려고 했다. 그렇지만 어쩌랴! 그 많은 집 중에 어디에도 사람이 죽지 않았던 집은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헤매던 고따미는 마침내 죽는다는 게 얼마나 보편적인 사실인가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 세상의 그 모든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들이 덧없다는 것을, 또 모든 만남은 이별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생명은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슬픔에서 벗어나게 된 여인은 죽은 아기를 시체 안치장에 안치한 후 사원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이 법,

이는 마을의 법도 도시의 법도 아니네.

이 씨족의 법도, 저 씨족만의 법도 아니네.

온 세상 아니 천상세계마저도

이 법에선 벗어날 수 없네.”


부처님의 지도하에 끼사고따미는 무상이야말로 모든 조건 지어진 존재의 근본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첫 번째 성위인 예류과를 성취했다.

이 밖에도 부처님께서 삶의 간난신고로 고통받는 여인들을 위로하고 도와주신 예는 수없이 많다.


환자를 보살피시다


병든 사람들에 대한 부처님의 자비심 또한 각별하셨다. 한 번은 뿌띠가따 띠싸라는 비구가 궤양에 걸려 더러운 침대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것을 부처님이 보셨다. 그 즉시 스승께서는 따뜻한 물을 준비하시어 아난다 존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손수 이 병든 비구를 씻어주고 자상하게 병구환을 해주셨다. 그런 다음 법을 설하시어 이 병자가 죽기 전에 아라한과를 성취하도록 도와주셨다. 띠싸 아라한이 입적하자, 장례식을 법에 맞추어 거행한 다음 부처님은 탑을 세워 그의 유골을 안치하도록 조치하셨다.74) 그 외에도 여러 번 스승께서는 병든 비구들을 몸소 돌보아 주셨으며 제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촉구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를 시중들 듯 그 마음으로 환자를 시중들도록 하라.”



이렇듯 부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측량할 길이 없고 너무나 넓어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사랑의 마음을 간곡히 가르치셨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자식을 그것도 하나뿐인 자식을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듯이 너희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빠짐없이 감싸는 생각을 온전히 지키도록 하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언제나 자비로 넘치고 있듯 부처님의 행동도 한결같이 자비심으로 가득하셨다.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눈을 뜨게 하고, 환희에 젖게 만들며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편력하는 동안 부처님은 무지로 말미암아 삿된 견해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신을 섬기기 위해 짐승을 도살하는 광경을 수없이 목격하셨다. 이들에게 부처님은 타이르셨다.


“생명이란 누구나 뺏을 수는 있지만, 줄 수는 없는 것. 모든 생물은 제 목숨을 사랑하여 지키려 애쓰네. 목숨은 경이롭고, 소중하고, 즐거웁다네, 비록 하찮아 보이는 미물에게도.”


실로 당시는, 사람들이 신에게 자비를 구한답시고 무자비한 짓을 서슴지 않던 시절로, 제멋대로 신을 상정하고는 그 제단에 무고한 동물들을 희생으로 올림으로써 오히려 신을 모독하는 끔찍한 짓거리를 자행, 전 인도를 피로 얼룩지게 만들던 시절이었으며, 고행자와 바라문들의 그릇된 의례 의식 때문에 인간은 재앙을, 동물들은 단말마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자비의 화신인 부처님이 나타나서 일찍이 모든 깨달은 분들이 가셨던 그 옛길, 사랑과 이해로 충만한 정의로운 그 길을 다시 찾아내어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평온과 침착


득과 실, 호평과 악평, 찬탄과 비난, 고통과 행복 등등의 온갖 생의 우여곡절이 부침하는 와중에 처해서도 부처님은 조금도 흔들리는 일이 없으셨다. 단단한 바위처럼 그분은 요지부동이셨다. 행복한 일이 생겼다 해서 의기양양해 하지도 않았고, 불행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의기소침해 하지도 않았다. 물론 언쟁이나 적개심을 조장하는 일은 더욱이나 없으셨다.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더불어 싸우지 않노라. 세상이 나를 두고 싸우려들 뿐이노라. 법을 설하는 자는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노라.”


또 제자들을 이런 말씀으로 훈계하고 계시다.

“비구들이여! 남들이 여래를 헐뜯고, 법을 헐뜯고, 승단을 헐뜯는다 해서 그 때문에 난처해하거나 적대심, 악의 따위를 품어서는 안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너희들이 그 때문에 못마땅해 하거나 성을 내면 정신적 향상에 방해를 입을 뿐 아니라, 그들의 말이 어디까지 옳고 어디까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게 되고 만다. 너희들은 그런 때에 사실이 아닌 것은 해명함으로써 모든 것을 분명히 밝혀주도록 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또한 남들이 여래를 추켜올리고, 법을 추켜올리고, 승단을 추켜올려 말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우쭐해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들의 내면의 성숙에 큰 장애가 될 뿐이다. 그런 때는 옳은 말은 옳다고 인정하고 그 옳은 까닭을 설명해줘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반대자나 적대자에게까지도 불친절한 언사를 쓰신 경우는 한 번도 없으셨다. 부처님과 그 법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부처님은 결코 그들을 적으로 보지 않으셨다. 남들이 격렬한 어조로 비난해 올지라도 부처님은 성을 내시거나 혐오감을 품거나, 불친절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전장에서 코끼리가

날아오는 화살을 견뎌내듯

그처럼 나는

남들의 비방과 적대적 안색을 참아내리라.”


데와다따


부처님의 위와 같은 인욕정신은 데와다따와의 관계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데와다따는 부처님의 사촌으로 승단에 들어와 범부의 신통력을 얻은 사람이었다. 뒷날 그는 승단의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게 되면서 부처님과 두 수제자 사리뿌따, 마하 목갈라나에 대해 시기심과 악의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데와다따는 마가다 국 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젊은 아자따사뚜 왕자에게 접근하여 교묘히 비위를 맞추어 가면서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이 웰루와나 정사에서 왕을 비롯한 많은 대중들에게 법문을 설하시고 계실 때 데와다따가 부처님에게 다가와 인사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승이시여! 당신께서는 이제 연로하시어 기력도 쇠잔해지셨습니다. 스승님은 모든 근심, 걱정을 벗어나 은거생활을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승단은 제가 이끌어 가겠습니다.”


부처님이 이 제안을 거부하시자, 데와다따는 당황하여 화를 내면서 부처님에게 증오와 악심을 품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 길로 그는 못된 흉계를 품고 아자따사뚜 왕자를 찾아가 왕자의 감춰진 야심에 불을 붙이는 말을 했다.

“왕자님이여! 부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기 전에 언제 지배자가 되어 보겠습니까? 나는 세존을 죽이고 승단의 지도자가 되겠습니다.”


아자따사뚜가 아버지인 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데와다따는 불한당들을 매수하여 부처님을 해치려 했다. 그러나 그 일이 실패하자 다시, 부처님이 라자가하에 있는 기자꾸따 언덕을 오르고 계시는 기회를 틈타 그 자신이 직접 바위를 세차게 던져 굴렸다. 바위는 굴러내리다 둘로 쪼개지면서 조그만 파편이 부처님에게 튕겨 발에 가벼운 상처를 내었다.

그 후에 다시 데와다따는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든 다음, 부처님을 향해 내몰았다. 그러나 이 짐승은 부처님의 자애의 힘에 눌려 부처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버렸다.

다시 데와다따는 승단 내에 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렇게 일으킨 불화도 길게 끌어지지를 않았다. 모든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자, 데와다따는 실의에 빠져 물러났다. 얼마 안 되어 그는 병이 들었고 병상에서 자신의 어리석었던 짓을 뉘우친 끝에 부처님을 친견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들 것에 실려 부처님께 가던 중 운명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기 전 그는 참회의 말을 하면서 부처님에게서 귀의처를 구해마지 않았다.


마지막 나날들


세존의 입멸을 그린 『대반열반경』은 부처님 생애의 마지막 몇달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빠짐없이 소상하고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세존께서는 팔십의 고령에 다다르셨고, 그의 두 수제자 사리뿌따와 마하 목갈라나는 이미 석달 전에 입적했다. 고따미 빠자빠띠, 야소다라, 라훌라도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때 부처님은 웨살리에 계셨다. 우기가 닥쳐오고 있었으므로 많은 비구대중과 더불어 우기를 나기 위해 벨루와로 가셨다. 거기서 중병이 부처님을 엄습하여 심한 통증을 일으켰으나 세존께서는 침착한 가운데 정념을 유지하며 이를 견디셨다. 바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승가대중에게 유훈도 남기지 않고 입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엄청난 의지력으로 병과 싸워 이겨내심으로써 생명의 가닥을 이어 나가셨다. 점차 병환이 호전되어 마침내 완전히 회복되자 그는 시자인 아난다 존자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제 나는 늙고 나이도 찼다. 내 여행은 이제 막이 내려지고 있다. 내 수명은 다 되어 이제 여든에 접어들었다. 아난다야! 낡은 수레를 굴리려면, 가외로 신경을 많이 써야 되는 것처럼 여래의 육체도 의지력을 많이 기울여야 간신히 지탱할 수 있다. 여래의 육신이 편안하려면 여래가 바깥 경계에 마음을 써서 속세의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어야 하는 이 고된 일을 그만두고 무상정(無相定)에 들어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아난다여! 따라서 그대 자신을 자기의 섬으로 삼을지니라. 그대 자신을 자기의 의지처로 삼을지니라. 남을 의지처로 기대서는 안되느니라. 법을 섬으로 삼고 굳게 붙들지니라. 법을 의지처로 삼고 굳게 붙들지니라. 다른 어떤 피난처에도 의지하려 들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야! 지금도, 내가 간 다음에도, 누구든지 자신을 섬으로 삼아야 할지며,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야 할지며, 어떤 바깥 피난처에도 의지하려 들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야!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 될 것이니라! 다만 그들은 모름지기 향상하려는 의욕으로 충만해 있어야 하느니라.”


벨루와를 떠나 부처님께서는 마하와나로 여행을 하셨고, 거기에서 웨살리 근처에 머물고 있는 승려들을 모두 모이게 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내가 깨친 대로 법을 그대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대들은 법에 정통하도록 노력해서 이를 닦고, 이에 대해 명상하고, 널리 이를 펴도록 하라. 이 세상에 대한 연민에서, 신들과 인간들의 선과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법문을 마치셨다.

“내 나이 이제 가득 차서 생은 바야흐로 끝나려 한다.

나는 너희들을 떠난다, 오로지 나 자신에 의지하여 나는 가노라!

비구들이여! 부디 방일하지 말고 힘써 마음 챙기며 계율을 잘 지켜라!

결의를 굳건히 다져라! 네 자신의 마음을 빈틈없이 지켜보라!

이 교법과 계율을 싫증내지 않고 단단히 붙드는 사람은

생사의 바다를 건너가 비탄을 끝내게 될 것이다.”


 이제 병에 지쳐, 허약해진 몸으로 세존께서는 힘들게 여행을 계속하셨다. 아난다 존자와 수많은 대중들이 그분을 수종했다. 이렇듯 길고 피곤한 마지막 여행 중에서도 부처님은 남을 보살피는 마음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마지막 공양을 올린 대장장이 쭌다에게 법문을 설하여 제도하시고, 또 도중에 만난 알라라 깔라마의 제자 뿌꾸사를 위해서도 가던 길을 멈추고 일일이 질문에 대답하여 제도함으로써 그를 부처님과 법과 승단을 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발심시켜 주셨다.


세존께서는 드디어 꾸시나라 (또는 꾸시나가라)의 말라 족들의 살라나무 숲에 도달하셨다. 바로 그의 길고 먼 여행의 종착지였다. 이곳이 마지막 휴식처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신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피곤하구나. 아난다여, 눕고 싶다. 저 두 그루 살라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하여 자리를 펴다오.”

그러고서는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를 이루신 채 한 다리를 다른 다리에 포개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자리에 누우셨다. 다시 아난다 존자에게 일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크거나 작거나 본분을 다하는 사람, 법다이 처신하여 올곧게 삶을 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값진 경의로 여래를 올바로 존경하고, 예배하고, 경모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아난다여! 그대는 크거나 작거나 본분을 다하도록 성실하라. 법다이 처신하여 올곧게 살도록 하라. 아난다여, 이와 같이 노력할지니라.”


마지막 귀의자


그때 마침 수밧다라는 떠돌이 고행자가 꾸시나라에 있던 중 부처님의 입적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평소에 고뇌하던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 부처님께 여쭈어보려고 급히 살라나무 동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이 가시는 마지막 순간을 번거롭게 해드리기를 원치 않아서 친견 기회를 좀처럼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들 간에 오고 가는 얘기를 등 너머로 들으신 세존께서는 수밧다가 순수한 구도심에 차있으며, 몇 마디만 일러 주어도 깨달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바로 아시고는 아난다 존자에게 그를 들여보내라고 이르셨다.

수밧다의 의문은 다른 여러 사상유파의 지도자들, 즉 뿌라나 까사빠, 니간타 나따뿌따 등등이 과연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세존께서는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밧다여! 어떤 교법과 계율이든지 그 안에 팔정도가 없으면 어떤 성위(聖位)도, 그것이 첫 번째 성위이든 두 번째 성위이든 또는 세 번째이든, 네 번째이든 그 어느 단계의 성위도 바르게 얻은 사람이 있을 수 없노라. 수밧다여! 어떤 교법이나 계율이라도 팔정도가 거기에 있으면 그 교단에는 첫 번째 단계의 진정한 성인도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단계의 진정한 성인도 반드시 있는 법이니라. 나의 이 교법과 계율에는 팔정도가 있으며, 또한 그 모든 단계의 성위를 각기 바르게 이룬 사람들이 있느니라. 다른 스승들의 가르침에는 팔정도도 진정한 성인도 찾아볼 수 없느니라. 수밧다여! 이 교단에서는 수행자들이 올바른 삶을 누릴 수 있느니라. 그 덕으로 이 세상에 아라한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니라.”87)


세존의 이와 같은 말씀을 듣자 수밧다는 신심이 우러나 부처님과 법과 승단에 귀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승단에 들어오기를 원하였고, 부처님은 아난다 존자에게 그를 받아들이도록 이르셨다. 이리하여 수밧다는 부처님께서 손수 귀의시킨 마지막 개종자이자,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애써 노력한 결과 오래지 않아서 최고의 성위인 아라한위를 성취했다.


마지막 정경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대들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스승의 말씀은 끝났다. 우리는 이제 스승 없이 지내야 한다.’ 그러나 아난다여!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느니라.”


“내가 간 후에는 내가 설한 법과 내가 정한 율을 너희들의 스승으로 삼도록 하여라.”


“비구들이여! 어떤 형제들은 마음속에 붓다나, 법이나, 길(magga)이나, 길을 나아가는 방법(paṭipadā)에 대해서 의심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비구들이여, 마음 놓고 물어라. 다음에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탓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즉 ‘그때는 스승을 마주 대하고 있으면서도 세존께 여쭙지 못하고 말았다’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잠잠히 침묵을 지켰다. 두 번, 세 번,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셨고 비구들 역시 똑같이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세존이시여,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저는 실로 여기 모인 비구들 가운데 붓다와 법과 길과 길을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이나 의혹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믿습니다.”


세존께서도 아난다 존자의 말을 승인하시면서, 덧붙여서 여기 모인 모든 대중은 수행이 가장 뒤쳐진 사람까지도 반드시 구경의 해탈을 장차 얻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서는 잠시 후 세존께서는 지금도 또 미래에도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어 하는 이 대중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남기셨다.


“그럼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내 너희들에게 간곡히 이르노라.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다[諸行壞法].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

(Vayadhammā saṃ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a)”

이것이 부처님의 유훈(遺訓)이셨다.


그러고서 부처님께서는 아홉 단계의 선에 차례대로 드셨다. 먼저 네 가지 색계선에, 다음에는 네 가지 무색계선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상멸처정(受想滅處定)에 드신 것이다. 그런 다음 거꾸로 이 모든 단계를 거슬러 내려와 초선에 이르신 다음 다시 제4선에까지 올라가셨다. 평온에 기인하여 정념(正念)의 청정을 이룸을 특징으로 하는 제4선에 다시 드시자 거기서 곧바로 반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은 마침내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을 실현하신 것이다.


역사기록을 아무리 찾아봐도 부처님처럼 카스트, 계급, 또는 신앙에 관계없이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치신 분은 달리 또 찾아볼 수 없다. 깨달은 그 시간부터 생을 마친 그 순간까지 그 분은 인류를 향상․성숙시키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온 힘을 쏟으셨다. 그분은 공익을 위한 노력을 잠시도 늦춘 적이 없었고,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본 적이 없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항상 건강하셨던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또렷이 깨어 있어 활기에 넘치셨다.


이제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신 지 2,500여년이 지났지만 그 분의 사랑과 지혜의 메시지는 인류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면서 순수한 그대로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탑 앞에는 매일같이 꽃이 숲을 이루며 바쳐지고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를 거듭 외우고 있다. 그 분의 위대함은 약한 불빛을 흡수해 버리는 태양과도 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광명을 발하고 있고, 그 분의 법은 여전히 세파에 지친 순례자들을 열반의 안전과 평화 속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출처 : 홍사성의 불교사랑
글쓴이 : 사자후 원글보기
메모 :

서기전 528년 7월 보름날 저녁, 해가 지면서 때 맞춰 달이 막 떠오르고 있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부처님은 그들에게 법을 설하기 시작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극단은 출가자들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일이니 이는 저열하고, 천박하며, 세속적이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익됨이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고행이니 이는 고통스럽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익됨도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들 극단을 피해서 중도를 깨달았느니 이는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가져오며 적정과 신통지,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끈다. 비구들이여!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八支聖道]이다.

정견(正見 : 바른 견해)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정어(正語 : 바른 말)

정업(正業 : 바른 행위)

정명(正命 : 바른 생활수단)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념(正念 : 바른 마음챙김)

정정(正定 : 바른 정)이다.”

 

다시 부처님은 그들에게 사성제(四聖諦)를 설하셨다. 고(苦), 고의 일어남[苦集], 고의 멸[苦滅], 고의 멸에 이르는 길[苦滅道]의 네 가지 성스런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30)

 

이렇게 지고하신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선포하심으로써 마침내 법의 바퀴(Dhamma-cakka)를 굴리기 시작하셨다. 이 첫 법문, 녹야원의 메시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땅 위를 걷는 모든 생물의 발자국이 코끼리의 훨씬 큰 발자국에 담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포괄된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각 항목을 설명하시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智 ñāṇa)가, 혜(慧 paññā)가, 명(明 vijjā)이, 광(光 āloka)이 나의 내면에 나타났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관한 나의 통찰지혜[知見 ñāṇadassana]가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것으로 밝혀지기 전에는 나는 결코 자신이 비할 바 없는 지고의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얻었다고 선언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런 진리에 관한 나의 지견이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것으로 분명해지자 그때 비로소 나는 비할 바 없는 지고의 깨달음을 얻었음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자 다시 나의 내면에 지견이 솟아났다. 즉 내 마음의 해탈[心解脫]이 확고부동하며(akuppā me ceto vimutti), 금생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더 이상의 몸받음[再生]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31)

요즘 부처의 가르침에 흠뻑 빠져 있다. 

인류의 스승이시여!

 

(유튜브 동영상은 막아 놨고, 불교방송에서 볼 수 있네요)

http://www.btn.co.kr/pro/Program_contents.asp?ls_StSbCode=CATPR_12&PID=P634


아래는 동영상을 보며 요약해 본 글

 

<27 부처님의 단계적 가르침>

1. 계를 지켜라 - 살생금지, 내 것 아니면 손대지 않음. 주지 않은 것 갖지 않기, 사음 금지, 거짓말 하지 않는 것, 술을 마시지 마라.

- 3층집이라면 1층 계로 만든집, 2층 삼매의 집, 3층 지혜의 집. 계는 우리를 보호함. 몸과 마음은 우리 게 아님.

- 계를 지키면 부자가 됨. 좋은 평판이 생긴다. 어디가도 당당하다. 죽을 때 맑은 정신으로 지킨다. 좋은 곳에 태어남

2. 감각의 문을 지켜라. 눈코입귀몸마음을 지켜 상을 취하지마라.

- 싫음,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 감정으로 보지 말고 그냥 본다. 처음 보는 것처럼 궁금하게 본다.

- 볼 때 전체적 부분적 상도 취하지 마라. 예를 들어 여자구나 예쁘다로 판단하지 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보라. 평가, 판단하지 마라.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개념으로 보지 마라.

- 내 속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보나 그 대상은 온전한 그를 봐주기 원함.

- 욕심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된다. 

3. 적절히 먹어라 몸을 유지하기 위해 먹어라. 청정한 생활을 위해서 먹어라. 과식하지 마라.

4. 항상 깨어 있어라. 마음의 장애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하도록

5. 마음챙김과 알아차림

- 내가 현재에 의식을 두고 걸으면 걷는 것을 먹으면 먹는 것의 현상을 그대로 아는 것. 생각이 들면 생각나는 걸 아는 상태가 되는 것.

6. 우리 속의 다섯 장애를 제거하고 선정을 경험하는 것.

- 감각적 욕망(눈,코,입,귀,몸,마음), 분노 원한 미움(남 미워하는 것 모두), 몽롱하고 게으른 것, 들뜸과 후회, 의심(불법승 삼법승에 대한 의심, 법에 대한 의심, 승가에 대한 불신, 진리에 대한 의심)

- 선정 중 하나 호흡 수행으로 마음을 한 군데 모을 수 있다. 놓는 연습이 선정이다.

▒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어떤 상태인지요?


비유를 들어서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데 강도가 쫓아옵니다.
칼을 휘두르며 돈 내놓으라고 달려드니 두려워서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아무리 도망을 가도 계속 따라옵니다.
돌아보면 뒤에 있고, 또 도망치다가 돌아보면 바로 뒤에 있고..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어 관세음보살을 간절하게 부릅니다. 살려달라고..
그랬더니 보살님이 숨겨줘서 살아나고.. '아휴 살았다..' 한 숨 돌립니다.
강도를 만나, 아무리 피해도 따라온다.. 이게 우리네 세상살이입니다.
자식문제 해결하면 돈문제, 돈문제 해결하면 부모문제, 부모문제 해결하면 또 무슨 문제..
길거리에 두더지 게임처럼.. 이거 때리면 저거 튀어나오고, 그거 때리면 또 다른 게 튀어나오고..
빨리 때리면 빨리 튀어나오고.. 항상 문제가 꼬여 가는 것, 이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런데 눈을 번쩍 떴더니.. 꿈이야.
'어 꿈이네~' 알고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됐습니다.
강도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강도라는 게 없었고,
그러니 두려워 할 이유도 없고, 도망갈 일도 없고, 구원을 요청할 일도 없고
구원해주는 자도 없고, 고마워할 일도 없고..
이게 깨달음입니다.

 

▒ 그런 깨달음은 사회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요?


자기를 한번 잘 살펴보세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살펴보세요.
항상 내 문제를 걱정하는지.. 돈 벌어야 하는데, 집 사야 하는데, 뭐해야 되는데, 뭐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서.. 친구가 도와줘야 되는데, 친척이 도와줘야 하는데, 부처님이, 하느님이 도와줘야 하는데..
그래서 바쁜 중에도 절에도 갔다가 교회도 갔다가.. 부지런히 다닙니다.
이렇게 늘 내 문제만 걱정하고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이 중생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서로 도와달라고 아우성이죠.


그런데 깨달은 자, 법(法)의 이치를 깨달은 자는 어떠한가?
그는 일단 자기문제가 해결된 사람입니다.
물론 세수하고 밥 먹고 하지만, 그렇게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몇 가지 일을 빼고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인은 할 일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할 일이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선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는 무엇을 하고 사는가? 그는 세상에서 필요한 일들을 합니다. 세상과 이웃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첫째,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기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고
둘째, 세상과 이웃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을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이타' 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깨달음을 이루신 이후에
세상 사람들이 괴롭다고 하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재물로 도와준 것도 아니고.. 부처님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데
온갖 것 다 가진 왕도 부처님을 찾아와 '괴로워 죽겠어요' 하면
부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쳐주시곤 하셨습니다.

 

▒ 어떤 과정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지요?


지금 자기 자신을 딱 보세요.
종교를 떠나서.. 기독교다 불교다.. 종교와 종파를 다 떠나서
결혼 했다 안 했다, 불교를 안다 모른다.. 이런 걸 다 떠나서.. 
자기가 자신을 한 번 하루 동안 쭉 관찰해 보세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면서 사는 지를 한번 관찰해 보세요.
마음이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누가 잘 되면 시샘하고 배 아파하고 그러는지 아닌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궁리를 하고 사는지, 실제로 무슨 행동을 하는지 한 번 관찰해 보세요.
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한지 아니면 괴로운지.. 남을 도와주고 있는지..
뭘 물어서 가르쳐주는지, 도와주는지, 경제적으로 도와주는지, 무슨 일을 해주는지..
이렇게 남을 도와주는지, 아니면 오히려 남들을 불러다가 시키고 있는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이러고 살고 있는지..


이럴 때, 도움 받는 존재에서 도움 주는 존재로의 전환.. 이게 수행입니다.
괴로워하는 존재에서 괴로움이 없는 존재로
온갖 것에 속박받는 존재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제 멋대로 하는 존재에서 주위를 살피는 존재로
사랑을 못 얻어 괴로워하는 존재(사랑고파병)에서 사랑하는 존재로
이해를 구하는 존재에서 이해를 하는 존재로
자기의 존재가 전환되어간다면 이걸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그래 해도 수행이고, 절에 다니면서 그래 해도 수행이고
불교 안 믿고 그래 해도 수행입니다.
참선 안 해도 그렇게 나아가면 수행이고
참선 해도 그렇게 나아가지 못 하면 수행이 아닙니다.
참선하는 게, 염불하는 게 이렇게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면 수행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수행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건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제가 수행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살펴보면 알 일일입니다.
또 점검해봐서 '아이고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구나'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 내 상태가 이렇구나' 하고 한 발 나아가는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서 가면 되고, 또 넘어지면 또 일어나서 가면 되고..
넘어지는 걸 갖고 시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겁니다.
긍정적으로 본다는 게 '잘 될 거다' 이렇게 본다는 게 아니라
넘어지면 넘어진 것을 기초로 해서, 다시 출발한다 이 말입니다.
지난 일로 괴로워 하거나, 오지도 않은 일로 근심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럴 녘에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간다..
이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 직관, 깨달음의 순간은 어떠한가? <틱낫한 스님> http://cafe.daum.net/santam/IQZL/146

 

출처 : 불교는 행복찾기
글쓴이 : 햇빛엽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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