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이다.
딸아이는 ANU(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 : 캔버라 소재)에 1년간 교환학생이 확정되었었고,
아들은 의대에 그것도 장학금까지 받으며 합격이 결정 난 12월이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더 없는 축복의 시간들이었다.
앞으로 아이들에게는 힘든 날들이 펼쳐지겠지만, 합격의 영광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그 12월 31일 남편은, 퇴근 후 어디 카페라도 가서 가족끼리 막연회를 가져보자 제안하였다.
2005년 12월 31일, 시끄러운 곳은 피해 조용한 찻집에 넷이 오붓이 앉았다.
남편의 얼굴은 기쁨으로, 우리 셋은 흡족함으로 마주 했다.
이어, 남편은 조용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털어놓으며, 준비한 투명 상장을 읽는다.
워드로 작성해서 가져오려다, 여의치 않았단다. 빈 넵킨을 들며 생각한 문구를 곧바로 읽는다.
“상장! 박××, 위 사람은 살림을 잘하고,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
가장으로서 이 상장과 상금을 드립니다.”하며 상금 50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이어, “상장, 원××, 위 사람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명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이어 ................ 이 상장과 상금을 줍니다.”
더듬거림도 없이 명확하게 읊은 아들과 딸의 공적 내용은 달랐지만, 아버지로서 기쁘고 고맙다는 거였다.
상금은 20만원씩.
그는 살면서 가끔 아내인 나를 향한 이벤트를 베풀어 왔었다.
그 많은 일 중에, 그날의 그 송년회, 그 이벤트, 그 상장과 상금은
가장 아름답고, 고맙고, 선명하고, 뿌듯하고 행복한 기억의 1순위로 남아있다.그는 아내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편이다. 내 행복의 근간은 모두 그 남자로 해서라고 믿게 한다.
6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무리 없이 제 역을 잘 해내어, 딸아이는 대기업에 엔지니어로, 아들놈은 의사고시를 앞 두고 있다.
남편은 명퇴를 하고 건강관리를 하며 세월을 보내는 '三食氏'가 되어있다.
어떻게 되어있든 '그대 내사랑'으로 여전할 밖에.........